(4)시장경제 대실험|사회주의서 자본주의로 가는 길|인플레·실업이 대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동유럽 사회주의의 실패는 정치적 실패에 앞서 경제적 실패에서 비롯됐다.
40년 이상 계속된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동유럽의 경제는 인적·물적 낭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파탄을 맞았다.
이제 동유럽국가들은 사회주의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전대미문의 대실험에 도전하고 있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상업중심지이자 젊음의 거리바치가 19번지 국제무역센터 2층에 자리잡은 부다페스트 주식시장은 헝가리가 추진하고 있는 시장경제개혁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상장기업 10개사 48년만에 지난해 6월 다시 문을 연 이곳은 개소 l년이 지난 지금 상장기업 수 10개, 총 주식 수 4천만주, 하루 평균거래건수 50∼60건, 거래액 1천5백만∼2천만 포린트(미화 20만∼26만7천달러)에 불과한 실적이지만 장래에 대한기대로 가득 차 있다.
개장시간은 오전10시30분. 12시까지 1시간30분 동안 일반 주식을 거래하며 오후엔 채권·농산물을 거래한다.
동유럽 국가들 중 경제 자유화의 선두를 달려온 헝가리지만 아직 국내총생산(GDP)의 85%를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상황에서 헝가리 자본시장이 본격적으로 기능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해 1월 급진적 경제개혁에 착수한 폴란드도 지난달 수도 바르샤바 시내 구공산당사에 주식시장 문을 열었으며 민영화작업을 끝낸 5개 기업이 주식을 상장했다.
현재 동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은 한마디로 정치에 있어 민주적 다원주의, 경제에 있어 시장경제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지금까지시도 된 적이 없는 역사적 대실험이다.
미 하버드대교수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위축을 받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개혁에 자문 역을 맡고 있는 제프리 색스 교수는 이 실험의 어려움을 『동유럽국가들이 과거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했던 것이 수족관을 생선수프로 바꾸는 것이었다면, 사회주의 경제에서 다시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것은 생선수프를 다시 수족관으로 만드는 것』으로 비유한다.

<"제3의 길은 없다">
동유럽국가들은 지금 하나같이 서구식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부르짖고 있다. 한동안 일부에서 주장해 온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말은 이제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와 시장은 서로 용납되지 않으며, 이제 「제3의 길」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있다.
문제는 개혁의 방법과 속도다. 급진개혁을 주장하는 측은 스피드야말로 개혁의 생명이며 점진적 개혁으로 시간을 낭비할 경우 개혁 자체를 망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지금의 동유럽처럼만 성적인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80년대 중남미국가들이 점진적이고 소폭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한 결과 인플레이션 퇴치에 실패했던 예를 들어 『고양이 꼬리를 자르려면 한번에 잘라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점진개혁을 주장하는 측은 급진개혁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즉 실업·급격한 생활수준 저하·빈부 격차 확대 등으로 인해 국민들이 받을 고통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코 프라하 경제전망연구소 얀 쿠바렉 교수는 클라우스 장관의 급진개혁이 체코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논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은 급진 개혁 주장이다. 폴란드가 이에 앞장섰으며 체코가 뒤를 따르고 있다.
89년9월 출법한 폴란드 자유노조정부는 지난해 1월부터 야심적이며 급진적인 시장경제개혁에 착수했다. 부총리 겸 재무장관인 레체크 발체로비츠의 이름을 따 「발체로비츠 계획」이라 이름 붙인 이 계획은 충격요법에 의한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통화주의자인 발체로비츠 장관은 통화공급 축소와 정부 보조금 폐지에 의한 인플레이션 억제와 가격기능 회복, 그리고 국유 재산의 민영화를 통한 민간부문의 확대를 정책목표로 삼았다.
89년 가을 자유노조 정부가 출범할 당시 폴란드는 월 평균 50%의 고물가 상승 속에 상점 앞엔 줄서기가 일반화돼 있었으며 암거래가 판을 쳤다.
발체로비츠 장관은 ▲가격 자유화 ▲정부 보조금 지급 중단을 통한 재정 적자 축소 ▲즐로티화 70% 평가절하를 통한 통화안정을 결정하고,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은행대출금리인상(40%) 및 통화량 억제 ▲임금인상률을 물가상승분의 60%이하로 동결시켰다.
개혁발표 직후 1개월 동안 소비자물가는 78%까지 급등했으나 2∼3개월이 지나자 월 5%미만으로 진정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상점엔 물건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으며 암시장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그동안 정부가 독점해온 무역을 일반에 허용한 결과 대외교역량이 50%나 급증했다.
왜곡된 가격구조의 정상화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민영화 작업. 시장경제는 참다운 민간부문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재산권 확립없는 시장은 마치 엔진 없는 자동차와 같다.
폴란드는 지난해말 현재 약1백10만개의 개인기업·조합이 세워짐으로써 바야흐로 개인기업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폴란드는 공산 치하에서도 전체 인구 3천8백만의 약3% 가까운 1백만의 개인기업 인구가 있었으며, 특히 농업의 경우 8할 이상이 개인농이었다.
시장경제를 위한 재산권 확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영기업의 민영화로 폴란드는 이를 위해 지난해 7월 민영화법을 제정, 이에 따라 소유권 이전부가 발족됐다..

<70% 민영화 계획>
소유권 이전부 야체크 부콥스키 중소기업국장은 지난해 l2월 최초의 기업 민영화가 이뤄진 이래 4월말 현재 전자·유리·건설·항공기 분야에서 5개 기업을 민영화했다고 소개하고 금년 말까지 대기업 4백개를 민영화하는 계획을 추진중이라고 밝힌다.
민영화 방법은 ①일반 주식매각 방식 ②대기업을 소단위로 분해 매각하는 방식 ③일반국민에게 주식구입용 쿠퐁을 지급하는 바우 처방식 등 세 가지로 나눈다.
①방식은 기업을 돈 있는 민간기업 또는 개인에게 양도하는 일반적 민영화 방식으로 지금까지 7개 회사가 이 방식에 의해 민영화됐으며 5개 회사가 현재 준비중이다. 폴란드 소유권 이전부 관계자는 금년 내에 모두 60개 기업을 이 방식으로 민영화할 방침이라고 밝힌다.
②방식은 대기업 경영자와 근로자들이 기업규모를 소규모 단위로 나둬 스스로 인수하는 방식으로 소유권 이전부 측으로부터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l2월 시작이래 1백개 기업이 이 방식으로 민영화했으며 금년내에 최소 5백개, 많으면 9백∼1천개, 기업이 이 방식으로 민영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인수자인 기업 경영자와 근로자가 사실상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로부터 인수자금을 대출 받음으로써 이뤄지기 때문에 「자본 없는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③방식은 지난해 대통령 선거 당시 레흐 바웬사 대통령의 공약에 따른 것으로 폴란드 성인 남녀 2천7백만 명에게 1인당 1억 즐로티(한화 6백44만원)어치의 주식 쿠퐁을 지급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 쿠퐁으로 바로 기업의 주식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쿠퐁소지자는 자신의 쿠퐁을 국가자산관리기금(NWMF)에 위탁하면 NWMF가 이것을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을 취한다.
폴란드 정부는 ③방식의 민영화 대상으로 우선 1백개 대기업을 선정, 이들 전체주식의 30%를 이 방식으로 민영화하도록 결정했다.
체코는 지난해 l2월 소규모사업 민영화법, 지난 2월 대규모 사업 민영화법이 의회에서 통과됐으며 이에 따라 금년중 약10만개의 소규모 사업체를 경매를 통해 민간에 불하할 예정이다. 대기업의 경우 주로 일반 국민에게 쿠퐁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민영화한다.
체코는 궁극적으로 전체국가 경제의 70%을 민영화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해도 없이 떠난 배>
헝가리는 이에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앞으로 3년 내에 사유재산 비율을 전체 경제의 30∼35%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같은 과감한 경제개혁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벌써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폴란드는 금년 말까지 인플레 1백%, 실업자 2백만 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며 인플레와 임금동결로 인해 실제 생활수준이 30% 저하된 상태다. 또 이로 인한 경기침체와 코메콘 시장 상실로 공업생산이 25% 하락, 문을 닫는 공장이 늘고 있다.
체코는 금년 중 인플레 50%, 실업 8∼9%에 25억 달러의 무역적자가 예상되며 헝가리 역시 인플레 50%, 1백20억달러의 재정적자, 2백10억달러의 외채에 시달리고 있다.
한 서방언론은 현재 동유럽상황을 놓고 『마치 수영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물에 던져놓고 수영 여부를 관찰하는 셈』이라고 비유한다.
지난달 초 체코 수도 프라하에선 전세계로부터 30여 명의 전직 국가지도자들이 모여 4일 동안 동유럽이 당면한 현실 타개 방안을 토의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나온 결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통제경제, 모두 제도로서 완전함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모호한 견해표시로 끝나고 말았다.
해도 없이 떠난 항해, 동유럽 국가들이 시장경제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글 정우량 특파원 사진 신동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