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시어로 옮겼어요"|첫 시집 『뿌리에게』 낸 나희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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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상태의 시를 쓰려 했습니다. 사회·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가 시를 쓸 때 늘 따라다녔습니다.』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단에 나온 나희덕씨가 처녀시집 『뿌리에게』(창작과 비평사)를 펴냈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 보내며 즐거움에 떨던/아 나의 사람을」
데뷔작 『뿌리에게』의 일부다. 뿌리에게 피 뽑아 흘려보내면서도 오히려 즐거움에 떨던 흙, 시적 자아에서 나씨의 여성다운 대지적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나씨의 모성적 사랑이 개인적·서정적 공간에서 이웃·사회·역사적 공간으로 부드럽게 확산돼 나가고 있음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창 밖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하늘에 대고 몇 장이나 사표를 썼다/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나와/남의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심정,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눈망울을 뒤로하고/내가 밝히려고 찾아가는 그 곳은/어느 어둠의 한 자락일까./이 어둡고 할 일 많은 곳에서/사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이렇게 사표를 쓰게 된다면/그 붉은 노을을 언제 고개 들고 다시 볼 것인가.」
나씨가 서있는 교단에서 우러난 시 『사표』중 일부다. 불합리한 교육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조목조목 리얼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갓난아기와 사표·사표로 교사로서의 당면한 심정을 퍼 올리고 있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들어있는 시, 그것도 나씨 특유의 모성적 사랑이 끈적끈적 묻어나 참여·민중시를 지향하면서도 그의 시는 감동으로 울려온다.
『관념이나 사회적 당위성에만 의거, 자기는 쏙 빠진 상태에서 쓰여진 도덕 교과서 같은 실패한 민중시들이 내시 쓰기의 반성의 거울이 됐습니다. 사회·역사를 노래하더라도 시에는 우선 감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감동은 우선 시속에 시인이 얼마나 정직하게, 치열하게 들어있는가에서 우러나오겠지요.』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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