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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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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해 정진석 대주교가 자리에 오름으로써 한국엔 두 분의 추기경이 나왔다. 추기경은 가톨릭 교황을 선출하는 권한을 지닌 중요한 직위다. 교황을 선출하는 것 외에 교황청 내의 성성(聖省)과 관청의 장관직을 맡는다. 교황이 상징이라면 추기경은 그 아래에서 각종 행정과 사무를 집행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가톨릭의 실제적인 운용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자리다.

추기경은 영어로 카디널(cardinal)이다. 어원은 나중에 원로원을 가리키게 된 라틴어 카르데(carde)다. 그 원래의 뜻은 경첩이다. 출입이 이뤄지는 문짝 가운데서도 문지도리.돌쩌귀 등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치다. 가톨릭 내에서 추기경이란 자리가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한자 추(樞)는 마찬가지로 문지도리를 뜻하는 글자다. 문의 축을 움직이는 것이나 그 아래에 파인 홈을 뜻한다. 추기경이라고 할 것 없이 추라는 한 글자에 벼슬 자리를 뜻하는 경(卿)만을 써도 '카디널', 즉 요즘 말로 추기경의 뜻은 충분히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기(機)라는 글자가 하나 덧붙여졌다. 기는 활보다 화살을 더 멀리 쏘아 댈 수 있는 쇠뇌[弩]의 발사 장치를 뜻한다. 문이 돌아가는 아귀의 축을 형성하는 추와 화살을 날려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기라는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추기'라는 말은 곧 사물의 핵심을 일컫는다.

추기경이라는 번역어에 앞서 추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역(易)'의 '계사(繫辭)'편이다. "언행은 군자의 추기(言行, 君子之樞機)"라고 나와 있다. 다음 구절은 "추기라는 핵심 기능이 발동하는 것에 영예와 치욕이 달려 있다"는 부연이다.

사람의 언행이 곧 추기란다. 이를테면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고 핵심적인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를 잘못 이어갈 경우 명예는 고사하고 치욕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남에게 내비치는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그리고 떳떳하게 갖추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게다.

단체 식언(食言)이 난무하고 있다. 아직 수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열린우리당 의원 상당수가 불과 몇 년 전 말과 행동을 갈아엎고 탈당했거나 할 태세다. 성직자인 추기경의 직명 번역어에까지 오르고 동양의 최고 덕목을 가늠하기도 하는 '추기'를 이들은 거스르려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한국 정치를 맡긴다? 문지도리와 경첩이 없는 문은 제대로 여닫을 수 없는데….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