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남자 오대양합숙 총지휘”/주민이 목격한 수유동 집단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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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비닐하우스 공장차려 생계유지/자수한 이세윤씨등 20여명 동거
오대양사건과 관련,경찰에 자수했던 오민철(34) 이세윤(45) 김영자(44·여)씨등 20여명은 88년 10월부터 9개월간 서울 수유4동 2백3평 대지의 단독주택에서 「오대양식」의 공동생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특히 30대 남자가 함께 살며 「제2의 교주」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이들이 「오대양」의 재건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다.
이웃주민들은 이들이 집단생활을 시작한 88년 10월말께 ▲하수도공사를 한다며 마당을 파헤쳤고 ▲마당에 감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집주변에 심한 악취가 났다며 오대양망령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고 있다.
◇30대남자=이웃주민들에게는 이들을 지휘하는 30대 남자가 공장을 관리하는 사장 정도로 알려졌으나 집단생활에 가담한 오대양직원들로부터는 「제2의 교주」로 추앙받는등 집단생활을 총지휘해 오대양재건과정에서 교주직을 대물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
주부인 40대 이웃주민은 『이 30대 남자가 1백70㎝ 가량의 키에 쌍꺼풀이 뚜렷한 귀공자타입이었다』며 『봉고를 몰고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이 주민은 또 평소 알고 지냈던 이 집의 70대 주방할머니로부터 『사장님은 집안이 좋고 인물도 훤칠한데도 결혼을 포기한채 우리같이 의지할곳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줘 자식보다 훨씬 낫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그러나 당시 30대 남자가 손윗사람들에게도 말을 함부로 놓는등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동생활=오씨등 20여명이 이세윤씨 명의로 수유동의 단독주택으로 옮겨온 것은 88년 10월25일.
이듬해인 89년 6월29일까지 오대양식의 집단생활을 그대로 답습해온 이들은 그후 뚜렷한 이유없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 기간중 앞마당에 10여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만든뒤 재봉틀을 들여놓고 점퍼 등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왔으며 마당 한켠의 텃밭에는 상추·당근 등을 재배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당시 비닐하우스안의 작업장에서 남녀 10여명이 밤낮없이 일했으며 그중 일부는 출퇴큰하는 사람들이었다』며 『이웃주민과의 교류는 전혀없이 폐쇄적인 생활을 해왔으며 반상회일 등으로 주부 3∼4명이 찾아가면 여러명이 몰려나와 「왜 왔느냐」며 극도의 경계심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또 이들의 구성원이 국민학생·20대 여성·50대 남자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매우 다양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또 『이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듯 때때로 괴성이 들려오기도 했다』고 밝혀 이들이 오대양의 상호집단폭행에 의한 「죄씻기」의식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이들가운데 70대 주방할머니와 40대 주부는 이사가기 열흘쯤전인 89년 6월초 돈을 빌리러 이웃집에 수소문하러 다니기도 했다는 것.
한편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인 89년 6월초 오민철씨가 이세윤씨에 이어 주민등록을 옮겼으나 실제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씨는 90년 3월 주소지를 서울 거여동으로 옮겼고 그후 전모씨(38)가 3개월 정도 살았으나 지난해 여름부터 빈집으로 남아있다.
◇주택=대지 2백3평·건평 26평 규모의 이 집은 황모씨(61·서울 우이동)소유로 알려졌다.
현재 이 집은 봉제공장으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의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자란채 폐가로 변해있다.
보일러실·현관 등에는 폐지와 과자봉지,국민학교 참고서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으며 대문안쪽에는 주인을 찾지못한 우편물 10여점이 쌓여있었다.<오영환·정형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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