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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낚시에 걸려든 아시아/이종대 본사 비상임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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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개발 미명에 생산·수출기지화/곳곳에 일제홍수…일서도 우려
소련과 동서유럽의 사태발전과 걸프전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려있는 동안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알뜰한 문전옥답 경영이 소리없이 진행되어 왔다. 아시아는 이제 일본의 「과잉진출」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우려를 일본인들 스스로 걱정할 정도로 짙은 일색을 띠고 있다.
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ASEAN국가들이 포함된 동아시아의 시장이 일제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아시아경영이 자아내는 개별 현상들과 움직임들은 이제 동아시아 각국의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어 그것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별난 짓으로 보일 지경이다.
필자가 하노이와 방콕을 방문했던 6월중순 일본 외상이 15년만에 하노이를 방문,베트남의 대외개방에 대한 지원을 다짐하고 있었으며,바로 그무렵 방콕에서는 일본계 메이커가 중심이된 국내자동차산업의 대외개방폭을 두고 정부와 업계 사이에 논의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6월11일 방콕의 일간지 비즈니스 포스트는 현지의 일본계 자동차 기업들이 수입차의 관세인하를 저지하기 위해 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태국에서는 일본계 조립 기업이 이나라 자동차생산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태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의 자동차산업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일본계 기업들이 진출국가의 자동차산업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종종 듣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현상은 태국에만,그리고 자동차산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사태가 궁극적으로 초래할 결과는 뻔하다. 동아시아국가들간의 무역과 기타 경제협력은 결국 일본현지 기업의 입김이 묻은 각국의 산업 및 무역정책의 규제하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근착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다시 활기를 띠는 일본의 수출붐 속에서 동남아에 대한 수출이 세계 어느지역보다 빨리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결과 한때 일본수출의 절반 가까이를 흡수했던 미국을 제치고 금년부터 아시아가 미국보다 더 큰 제1의 시장권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잡지는 아시아인들도 미국·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낚시에 걸려들었다는 지적을 곁들인다.
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고속에서 추진된 일본의 소나기식 해외투자는 아시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시아에서 일본투자의 중점이 최근 아시아 신흥공업국에서 ASEAN으로 이동,동남아지역은 일본의 생산·수출기지로 변모하고 있으며 일본의 대형 유통업체들은 홍콩·대만·태국 등의 유통시장을 잠식해 가고있다.
일본의 투자와 일본의 자본재 및 중간재를 바탕으로한 동아시아의 산업화는 경제개발,고용확대,소득증대의 과실들을 각국에 안겨주는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일본쪽보다 동아시아의 개도국들이 스스로 선택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경영구상과 맞물린 동아시아의 산업화 과정은 예외없이 아시아의 대일무역적자를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틀을 내장하고 있다. 아시아 개도국 쪽에서 보면 대일의존의 산업화 추진은 「적자의 덫」에 몸을 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대일로의 무역불균형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본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동아시아의 국가별 분업체제가 극도의 왜곡현상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부가가치가 높고 수용증가가 빠르며 전략적 중요성이 큰 산업부문과 공정들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개도국들은 그 나머지를 가짐으로써 협력관계가 일궈 낼 성과의 불균등 분배구조는 처음부터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지금처럼 「상호보완적 협력관계」로 미화될 것이다.
산업구조 왜곡의 조짐은 벌써부터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에 대한 일본기업의 현지투자 규모와 내용은 해당국가의 합리적인 산업화 정책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본기업의 투자수익 극대화에 기여하는 산업배치구도에 따른 것이다.
이같은 구도하에 가장 빨리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국가가 태국이다. 머지않아 태국은 일본인의 투자와 현지경영,그리고 일본의 자본재와 중간재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국가의 표본으로 지목될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일본의 아시아경제연구소조차 태국의 경제발전이 무엇보다 대외적 조건,특히 일본의 동향과 의사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태국보다 덜하지만 우리나라 역시 일본경제와 산업 및 기업의 영향이 경제활동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백화점과 상점들에 부쩍 늘어난 동남아산 일제들과 최근 국내 전자업계에 대한 일본 전자회사들의 특허료 요구 파상공세는 모두 일본의 아시아경영이 빚어내는 현상들이다. 대일적자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모습도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각국들에 공통된 현상이다.
아시아지역에서의 일본역할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잘보여주는 일본경제기획청의 보고서 「아시아 태평양지역­번영의 철학」은 서문과 결론에서 「협조적 번영관계」의 중요성을 크게 내세운다. 「공영」을 연상시킬 「공동번영」이란 어휘 대신 「협조적인 번영관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일본이 추구하는 아시아와의 「협조적 번영관계」가 반세기 전의 대동아 「공영」과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야 없겠지만 아시아인들의 의구심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일본의 아시아경영이 경제만이 아닌 종합적 영향력의 강화를 내다보게 하는 시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역할의 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나란히 진행될 것이다. 우리가 대대로 겪어온 힘의 본성과 일본의 아시아 경영 내막,그리고 이 지역에서의 미일간 힘의 이동이 한데 어우러져 아시아인들의 생활조건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지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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