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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불신임 당하는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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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요즘 바깥 세계에 비친 우리 모습은 말이 아니다. 지난주 파이낸셜 타임스는 '낙관과 비관으로 갈라진 나라-2002 월드컵축제가 휩쓸던 그 거리가 지금은 노조 시위와 항의 집회들로 뒤바뀌었다'는 말로 한국 특집을 시작했다. '한국은 파업 중' '한국은 정쟁 중', 심지어 '한국은 무정부 상태'라는 헤드라인도 낯설지 않다.

이해집단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그 자체가 민주화요 다원화며, 혼란스럽더라도 성숙한 사회로 가는 과도기적 진통이라고 참아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의 전체로 조화되고 균형을 이뤄야 그 사회는 역동적이 되고 전진을 위한 추진력도 생긴다. 각자가 제 살길 찾기에만 급급하다면 이는 다 같이 망하는 공멸의 길일 뿐이다.

'5대 악재'가 이미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농민 시위와 부안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반대 사태가 웅변하듯 우리의 국내 이해조정 능력은 국제사회가 심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전투적 노조들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이 더는 투자를 꺼릴 정도로 투자 환경은 악화일로다.

이라크 파병을 놓고 국론 분열과 함께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이 갈피를 못 잡고 이 과정에서 한.미 동맹관계의 장래는 불안하고 불투명해졌다. 신용 불량자의 양산과 신용카드사의 유동성 위기로 대외 신용등급에도 경보가 울리고 있다. 정치자금 수사가 재계로 불똥이 튀면서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한국 기업의 투명성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부패의 고리는 차단해야 마땅하지만 그 타이밍은 지금이 최악이다. 게다가 북핵 변수는 항상 잠복해 있다.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이 바로 정치다. 그러나 이익집단과 여론에 '끌려다니는 자(follower)'만 득실댈 뿐 매맞을 각오로 앞장서 설득하고 여론을 이끄는 지도자(leader)는 찾기 힘들다. 정치인도, 정당도, 청와대도 총선 전략에 목을 매달면서 국가 경영(statecraft)은 실종 상태다.

개혁도 자주도 다 좋다. 중요한 것은 그 목표와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고, 이것이 국민 모두에게 감지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수단과 방법이 제시돼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뭘 먹고살 것이며, 대외관계는 어떻게 재설정하고, 국내 및 사회 통합은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이처럼 절박한 국가적 과제도 없다. 무엇보다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경제 기조에 관한 정부 내 혼선부터 정리하고 새 성장전략 수립과 함께 경제팀도 재정비해야 한다. 파병 문제로 꼬인 한.미관계는 어떻게 풀며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른 전술적 공백은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다양한 이해관계가 제도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은 어떻게 구축하며, 사회 협약에 바탕을 둔 새 노사 협력체계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들 각론 마련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프랑스의 구국 영웅 드골은 "프랑스에는 위기가 와야 한다. 그것 말고는 2백65가지 치즈맛을 뽐내는 이 나라를 단결시킬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드골의 위기는 기회였고 이를 현실화한 것은 '프랑스의 영광'이란 비전이었다. 코드 맞는 인사들에 의한 국정 실험은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각 분야의 국정전문가(statecraftsman)를 기용해 코드에 맞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가 경영이고 진정한 개혁의 리더십이다.

재신임 정국은 비전에 입각한 국정 쇄신으로 돌파해야 한다. 국가 경영을 제쳐두고 지지 세력 확보를 위한 총선 전략에 급급한다면 국제사회에서 정작 대한민국이 불신임당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적이 두렵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