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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乙亥명당, 朴도사를 낳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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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사(박재현)는 어떻게 해서 번갯불을 얻을 수 있었는가? 도사가 되는 사람들의 출생 배경과 학습과정은 어떠한가? 이 '과정(process)'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강호동양학의 주된 관심사에 해당한다. '도사'직업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유용한 판례집이자 학습자료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박도사의 탄생부터 보자. 모든 기인(奇人).달사(達士)들이 그렇듯이 제산(霽山.박재현의 호)의 출생에 관해서도 전설이 어려 있다. 제산이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이다. 함양은 영남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볼 때 경상좌도 쪽에서는 안동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고, 경상우도에서는 함양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함양에서 배출된 팔선생(八先生)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지금도 그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비롯해 양구졸(梁九拙).노옥계(盧玉溪).강개암(姜介庵).표남계(表南溪) 등이 그 팔선생이다. 궁벽진 산골동네인 함양에서 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강호파의 입장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면 한마디로 산수가 좋기 때문이다. 함양을 둘러싼 산세를 보면 영기(靈氣)가 어려 있는 명산이 많다. 그 명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들이 함양을 향해 발사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훌륭한 문필봉들이 포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함양 사람들은 함양의 개평(介坪) 출신인 정일두나 노옥계 같은 인물들은 모두 문필봉 정기를 받은 학자라고 이야기한다. 남한 일대에서 가장 빼어난 문필봉으로 평가받는 산청의 필봉산(筆峰山)이 이곳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함양이 전국 도사들의 집결지였다는 점이다. 함양 주변으로는 지리산을 비롯해 백운산.덕유산.황석산.가야산.황매산.광양 백운산이 있다. 각지에서 모여든 도사들은 일단 함양에서 짐을 풀고 며칠씩 머무르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떤 산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어떤 암자터가 영기가 있는지, 자신이 어떤 산으로 가야 도통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든 팔도의 도사들과 정보교환을 하던 장소가 바로 함양이었다. 함양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떠돌던 강호파들의 터미널이었다고나 할까. 조선시대 노마드(nomad.유목민)들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요즘도 함양에 앉아 있으면 지리산 일대에서 누가 산삼을 캤는지, 누가 한 소식을 했는지, 어떤 괴각(怪覺.괴팍하게 깨친 사람)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제산이 태어난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자락이다. 극락산은 덕유산에서 내려온 맥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라도 장수에서 경상도 함양과 안의 쪽으로 오고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영.호남의 여행객이 고개를 넘어 오고갔다. 제산의 집안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오가는 과객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과객들은 다양한 특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엔 명리와 풍수의 고수들도 섞여 있었다. 제산의 선대에서는 명당을 신봉하던 풍수매니어였고, 집안을 일으킬 묏자리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이들 술사에게 극진한 환대를 하곤 하였다. 이렇게 투자해서 구한 명당이 극락산 자락의 을해(乙亥) 명당이었다. 을해명당이란 어떻게 생긴 명당인가. 산의 맥이 '乙'자 형태로 내려오다가 끄트머리 부분에 조그마한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저수지를 해(亥)로 본 것이다. 이처럼 십간 십이지는 글자와 사람, 그리고 사물의 형상이 서로 구분없이 호환(互換)된다.

제산 집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쯤 제산의 증조부 묘를 '乙'자의 머리 부분에 써놓고 인물이 태어나기를 고대하였다. 그 인물은 육십 갑자 중에서 을해년에 태어난다고 믿었다. 을해명당이니까 을해년이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장)는 도올 김용옥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이 대목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즉 난자와 정자라는 생물학적인 재료의 단순결합에서 생명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합을 넘어서는 조상(ancestor)이나 신(God) 또는 어떤 영(spirit)이라는 다른 차원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탄생은 성욕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우주적 총체(cosmic totality)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인걸은 지령이다'는 명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인물의 탄생은 지령(地靈)이라고 하는 다른 차원의 개입이 작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오래된 믿음이었다. 필자가 지난 15년간의 현장답사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걸출한 인물들은 거의 지령의 개입이 있었다. 인물은 지령이 있는 곳에서 잉태되고 출산된다.

제산의 조부는 을해년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기다리던 을해년이란 바로 1935년이었다. 1935년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 밑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출렁거렸다.

을해년에 첫째 손자는 5월달에 태어났다. 첫째 손자는 장남에게서 나온 아들이 아니라 삼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에서는 셋째 아들 손자가 인물인가 하고 기대를 하였다.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서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면 반가운 징조가 아니었다. 이 조짐으로 보아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하나 태어났다.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둘째 아들은 처가살이를 해서 극락산 자락인 서상면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갓집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에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다가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대 중반이 넘었는데도 임신이 되었으니 주변사람들 보기에 민망하였다. 낙태시키기 위해 간장도 바가지로 먹고, 쓴 약초도 먹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제산은 을해년이 다 지나가던 동짓달에 태어났다. 낳아놓고 보니까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비범한 총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번 글자를 보면 단박에 외워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상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에 퍼져나갔다. 박도사는 타고난 신동이었던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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