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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커버스토리] 틈만 나면 돌린다, 우린 B-bo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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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퀴…두바퀴…세바퀴, 넷, 다섯, 여섯.일곱.여덟…. 공기가 윙윙 울리는 듯했다. 물구나무를 선 소년이 헬멧을 쓴 머리를 꼭지점으로 팽글팽글 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만큼 빠른 속도의 '헤드 스핀' 서른바퀴. 열아홉 범상길군이 만들어낸 소용돌이에 마음까지 빨려들어 간다.

휘이-잉. 새로운 바람이 끼어들었다. 하늘로 두 다리를 쭉 뻗어올리고 원형으로 질주하는 '에어트랙' 연속동작. 물구나무 선 이상진(19)군의 양 손이 스튜디오 바닥에서 날아오른다. 휙휙, 온몸이 빠르게 회전할 때마다 숨이 멎는다. 중앙일보 스튜디오에 프로 비보이팀인 '익스프레션'(http://star.rople.net/exs)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힙합 댄스 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브레이킨(Breakin')을 추는 사람을 '비보이'(B-boy)라고 한다. 익스프레션은 그 중에서도 최정상급 팀이다. 지난해 10월 세계 최고의 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 첫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지난 4월에는 프랑스에서 열린 '힙합 플래닛'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국제대회 5관왕이다. '배틀…'이 열리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는 시장(市長)이 환영 만찬을 열 만큼 유명 인사다.

"어린애들이 장난삼아 추는 춤이라는 편견이 가장 답답하죠. 비보이가 되면 밤에는 막노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미리 포기하는 친구들도 안타깝고요."

이우성(27)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겐 무대가 곧 직장이다. 이번달만 해외 일정이 세 개다. 네덜란드.독일.중국.일본…이들을 찾는 곳은 많다. MS.SK 등 각종 기업 홍보행사, 힙합 페스티벌 초청 공연.심사, 모바일 동영상 제공, 댄스 비디오 제작 등 일감도 줄을 잇는다.

열일곱 소년이 한달에 몇차례 공연을 하고 받는 돈이 약 1백만원. 경력이 쌓일수록 월급은 오른다. 해외 공연 때는 항공료.숙식비까지 제공받는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입이다. 부산.광주.울산.해남 등 지방 각지에서 온 팀원들에겐 숙소도 제공된다. 약 3만명의 팬클럽(http://cafe.daum.net/exbboy)은 금액으로 따질 수 없는 보수다.

매일 오후 4~10시 서울 응암동 연습실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예인들은 얼굴.이름값으로도 버틸 수 있지만 저희는 실력이 떨어지면 끝이에요. 배틀에서 계속 지면 누가 불러주겠습니까." 이호성(23)씨의 표정이 단호하다. 비보이들의 일대일 춤 대결을 '배틀'(전투)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무대는 전장(戰場), 연습은 곧 전투 훈련이다. '배틀 오브 더 이어'를 앞두고는 한달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 연습했다. 행사를 마치고 온 날도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 "춤추다보면 시간이 없어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노희우(17)군의 말이 설득력 있다. 24시간 열린 연습장,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야간 연습은 "다른 팀과 똑같이 연습하고 더 나은 결과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모두의 신념에서다.

"지금 부상 중이신 분?" 기자의 질문에 모두가 손을 번쩍 뜬다. 방금 전까지 허리를 반으로 꺾고, 온몸을 스프링처럼 튕기던 사람들이? 허리.발목.무릎 등 언제나 잔부상을 안고 살면서도 춤을 출 때만큼은 통증을 잊는 것이 비보이란다. 착지 때 머리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여름 내내 누워 지내야 했던 추연길(21)씨지만, 부상 원인이었던 덤블링 동작을 틈틈이 연습한다. 바닥에 대고 회전하는 일이 잦아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뭉텅 줄어든 뒤통수를 보여주면서 박경호(18)군은 키득키득 웃는다.

격렬한 춤인 브레이킨은 상당한 근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20대 후반만 돼도 추기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신대관(20)씨는 "독일에서 만난 할머니는 '윈드밀'(바닥에 등을 붙이고 회전하는 브레이킨 동작)도 하더라"고 웃었다. 해외에서는 40, 50대에도 활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 "춤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추는 것"이라고 말하며 예순이 돼도 비보잉을 할 것이라는 이들은 언제까지나 '소년'일 것이다.

비보잉(B-boying)=힙합 댄스의 대표적인 장르인 브레이킨을 말한다. 에어 트랙 등 강한 회전과 기계체조를 연상시키는 동작이 인상적인 '파워무브'와 프리즈(고난도의 자세로 수초 동안 정지하는 동작) 등 리듬을 타며 개성을 표현하는 '스타일무브'로 크게 나뉜다.

고난도의 춤인 만큼 부상 위험도 크기 때문에 보호대 착용이 필수. 팔굽혀펴기 등으로 근력도 길러야 한다. 브레이킨을 추는 비걸(B-girl)들도 적지 않지만, 강력한 파워무브는 비보이들이 주도하는 추세다.

국내 도입 시기인 1980년대 후반에는 해외 비디오 등을 보며 또래끼리 춤을 익혔지만, 최근에는 익스프레션 같은 프로 비보이팀이나 댄스 학원 등 '스쿨'에서 배울 수 있다. 월 10만원선. 인터넷 동호회에서 동영상.오프라인 모임 등을 통해 춤을 배우는 이도 많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고난도 동작 위주로 무작정 따라하다간 골절 등 큰 부상을 할 수도 있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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