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바다속 전투기' 공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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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2000년 8월 북해에서 러시아의 핵잠수함 'K-141 쿠르스크'호가 의문의 침몰 사고를 당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사고 원인을 놓고 신형 초고속 어뢰시험 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난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보다 몇달 전 미 해군 정보사령부에서 일하다 은퇴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먼드 포프가 간첩혐의로 모스크바에서 붙잡혔다.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20년형을 언도받았지만 변호인단조차 혐의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러시아의 극비 프로젝트인 초고속 어뢰 개발계획을 빼내려다 덜미가 잡혔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러시아가 해저에서 시속 3백~4백㎞의 어뢰를 개발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현재 실현 가능한 최고 속도인 시속 1백30㎞보다 3배 정도 빠른 셈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해주는 기술로 '초공동(超空洞.supercavitation)' 현상이 꼽히고 있다.

초공동 현상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면 수중전투의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항공대 항공우주 및 기계공학부 최주호 교수는 "지금은 잠수함이나 어뢰의 수중 소음을 최소화해 '조용한 전투'를 하는데만 기술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며 "초공동 현상을 응용하면 앞으로는 공중전처럼 잠수함에서 발진한 해저 전투기끼리 수중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핵탄두가 장착된 중장거리 어뢰나 미사일 복합체의 등장도 가능해진다. 기존의 스타워즈가 공중에서 접근하는 미사일에만 대비하고 있다면, 목표 지점의 해안 수㎞ 가까이 해저로 접근한 후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다. 공중방위 시스템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해안에 있는 도시를 파괴할 수 있게 된다.

'하늘의 전쟁'(스타워즈)이 '바다의 전쟁'(마린워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원래 프로펠러나 다른 동력추진 체계를 단 물체가 물속에서 앞으로 나가려면 물과의 마찰을 줄여야 한다. 물의 표면에 닿자마자 속도가 크게 줄기 때문이다. 물 속의 저항은 공기보다 약 1천배 정도 높다.

무기가 물속으로 발사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상에서 발사된 무기는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로 발사하더라도 수백m 깊이의 물 속에 이르면 앞으로 나갈 추진력을 잃어버린다. 지금까지의 해양 관련 기술은 이런 마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형상을 보다 매끄럽게 하거나 엔진 성능을 고도화해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초공동 현상을 이용하면 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미 샌터바버라 남가주대 해양기술 연구소장 마셜 튜린은 "그동안에는 기포가 물체의 진행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포가 생겼다가 터질 때의 충격파가 프로펠러나 물체에 부식이나 흠집을 만들기 때문에 기포를 없애는 연구를 주로 수행해 왔다"고 설명한다. 초공동 현상을 이용하려면 이와는 반대로 큰 기포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키고 제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러시아에서 초공동 현상을 이용해 개발한 '스콜'어뢰는 길이 약 8m에 무게가 3t 가량 되며 꼬리부분에 로켓엔진이 장착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몰락 이후 경제난을 겪고 있는 러시아는 스콜 어뢰를 이미 프랑스.중국.이란에 판매한 것으로 미국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뒤늦게 초공동 현상의 중요성을 인식, 대학과 해군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플로리다주립대, 방산업체인 안티온사와 록히드마틴사 등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초공동 현상은 이미 탄환에 이용되고 있다. 미국 방산업체 시테크디펜스는 헬리콥터에서 바다 속에 있는 항공모함이나 선박용 지뢰를 미리 탐지하고 발사해 무력화시키는 초공동 탄환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초공동 물체의 방향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수압도 장애물이다. 물체가 깊은 곳에서 이동할수록 압력이 세져 기포를 자유자재로 발생시키기 어렵다.

또 발사 후 바로 초공동 현상을 일으킬 만큼 순간 속도가 많은 추진력을 가진 엔진도 필수다.

최교수는 "이중 상당수의 문제는 러시아나 미국 쪽이 이미 해결했거나 해결 중"이라면서 "3면이 바다인 한국의 경우도 초공동 현상에 대해 연구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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