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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바람부는 독일미술] 中. 과거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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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한 남자가 고해성사라도 받겠다는 양 무릎을 꿇었다. 텅빈 전시공간에 달랑 놓인 이 조각상을 보러 앞으로 돌아간 순간, 관람객은 탄식하듯 과거 속에서 한 이름을 건져 올린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 1933년 독일 제국의 총리가 되어 반 유대주의를 내세운 국가사회주의 정권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인류를 피바람 속에 몰아넣었던 그가 망령처럼 되살아온 것이다.

지난 7일 독일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예술의 집)에서 막을 올린 '동반자(파트너스)'전에 나온 마우리치오 카틀란의 설치작업 '그를'은 수많은 독일인에게 반세기도 넘은 역사의 상처를 되새기게 하는 촉매가 됐다.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서있던 알렉산더 탐(뮌헨 괴테 인스티투트)은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종 같다"고 신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요즈음 독일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전시는 현대사를 주제로 한 기획전이다. 오래도록 벗을 길 없는 멍에를 독일인에게 지우고 패전으로 끝난 전쟁, 이어진 분단, 동독과 서독으로 찢겨 살며 겪어야 했던 아픔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재통일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그늘 등 '새로운 독일'에 앞서 청산하고 치유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미술계와 미술인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쉬른 쿤스트할레'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파울 클레 1933'은 1933년이란 연대가 상징하듯 히틀러와 연관된 또 하나의 역사성 짙은 전시다. 현대미술사가 손꼽는 화가 파울 클레(1879~1940)는 33년 나치 정부의 강압으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직을 빼앗긴 뒤 독일을 떠나게 되었고, 37년 뮌헨에서 나치가 조직한 '퇴폐 미술전'에 작품이 전시되는 등 정치적 박해를 당했다. 전시는 클레가 33년에 그린 1백점의 드로잉.유화.수채화를 처음 일반에 공개하면서 그가 삼엄한 검열 속에서도 얼마나 신랄하게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풍자했는지를 입증하고 있다.

이밖에도 뮌헨 시립미술관에서 2004년 1월 25일까지 이어지는 '바그너의 세계'전, 베를린의 마르틴 그로피우스-바우에서 2004년 1월 5일까지 계속되는 '베를린 모스크바/모스크바 베를린 1950~2000'전, 프랑크푸르트의 쉬른 쿤스트할레에서 내년 1월 4일까지 열리는 '꿈의 공장 공산주의-스탈린 시대의 시각문화'전 등 역사성을 내건 전시회가 줄을 잇고 있다.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 이렇게 독일 미술계를 파고드는 까닭에 대해 '베를린 모스크바'전을 기획한 크리스토프 타너는 "통독 뒤 일상 속에서 피부로 겪게 된 여러 사회 변화가 독일 사람들을 잊고 지내던 역사의식 속으로 던져 넣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며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역사의식은 더 치열할 것 같다. 독일 못지 않은 아픔을 겪은 한반도에서 역사는 미술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뮌헨.베를린.프랑크푸르트=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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