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일본경제] 上. 제조업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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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인 후쿠이(福井)현 게야(毛矢)산업단지에 위치한 세이렌사. 1백15년의 역사를 지닌 섬유회사다. 하지만 이곳의 입구에 내걸린 간판은 '세이렌 생활과학종합 스테이션'이다. 간판이 말해주듯 이곳은 단순한 섬유회사가 아닌 '디지털 섬유회사'다.

지난달 30일 찾은 게야 산업단지 내 1천여평의 세이렌 공장엔 종업원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백여대의 '디지털 섬유기계'만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비스코텍스'란 자체 디지털 기술을 통해 섬유 공정에 들어가는 물과 에너지를 기존의 20분의 1로 줄이고 기계 자체의 오작동률을 0%로 만들어 사람이 필요없다고 가와다 다쓰오(川田達男)사장은 설명했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섬유와 금속을 융합한 특수섬유 '플래트'는 세계 시장에서 70%의 점유율을 기록한다.

공정을 설명하던 가와다 사장은 "세이렌은 버블을 거치며 일본 제조업이 어떻게 변했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회사"라며 웃음지었다. 버블이 꺼지면서 이 회사는 졸지에 '규모만 클 뿐 오래된 굴뚝산업, 그것도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한마디로 '골칫덩어리' 회사로 전락했다. 가와다 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안 좋은 세가지를 모두 갖춘 회사'였다는 것이다. 물론 회사의 매출도 급전직하했다.

세이렌의 발상은 이때부터 바뀌었다. 매출의 90%를 차지하던 섬유 부문을 10%로 줄이고, 섬유와 관련된 정보기술 분야를 10%에서 90%로 바꿨다. 종업원들이 불안해 했지만 '그래야 산다'고 계속 설득하며 자신감을 줬다.

이후 축적된 기술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취급하는 섬유의 색을 10개에서 1천6백70만개로 획기적으로 늘리는 디지털 기술을 개발, '살아 있는 섬유'를 양산하는 세계 유일의 회사로 떠올랐다.

지난달 23일 도쿄 마루노우치에서 있은 이데미쓰고산(出光興産)의 기자회견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회사가 액정.PDP를 잇는 차세대 화면표시장치용 재료로 불리는 유기 EL(Electro Luminescence)의 수명을 다섯배나 늘리는 재료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기름회사'로 알려진 이데미쓰가 전혀 예상치 못한 유기 EL 재료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두께가 액정의 2분의1보다 더 얇으면서도 화질은 훨씬 뛰어난 이 재료의 개발로 이데미쓰는 '기름회사'에서 '첨단 IT회사'로의 깜짝 변신에 성공했다. 이데미쓰의 아케다가와 마사토시(明田川正敏)수석부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강점을 살리고 고부가가치 쪽으로 특화해 힘을 모은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후쿠이(福井)시 우루시하라(漆原)에 있는 마쓰우라(松浦)기계제작소. 메밀 밭에 둘러싸인 2천여평의 아담한 공장의 각 공정에 50여명의 종업원이 대형 공작기계에 매달려 땀 흘리고 있었지만 다소 한가한 느낌마저 들었다.

"경기가 안 좋아 그런 것이냐"는 질문에 우에무라 마코토(上村誠)총무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90년대 불황을 거치며 종업원 3백명 이내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전략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것 저것 만들지 않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것만 개발하고 만든다는 것이다.

한가해 보이는 이 공장은 공작기계 중 최고급의 품질을 자랑하면서도 1인당 생산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종업원 2백여명에 불과한 이 공장이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에 들어가는 엔진 생산공장에 설치된 공작기계를 만들었다. 지난 4월엔 금형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파 만들어진다는 상식을 깨고 아래에서 위쪽으로 얇은 막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금형을 만드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가공시간을 3분의 1로 줄이고 정밀도는 네배, 금형의 수명은 열배로 늘린 획기적인 기술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니의 오가 노리오(大賀典雄)전 회장이 이 회사의 회장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오가 회장은 "가장 밑바닥의 제조업이 튼튼해야 일본 경제가 바로 선다"며 1991년부터 무급으로 이 회사를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제조업 사랑'과 현장의 뼈를 깎는 '선택과 집중'이 우울했던 10여년의 아픔을 딛고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스미토모화학의 나카모토 마사미(中本雅美) 전무는 "자동차는 친환경과 고성능을 지닌 하이브리드 쪽으로, 종합가전업체들은 디지털가전 쪽으로, 그리고 소재업체들은 고부가가치 쪽으로 재빠르게 전환한 결실이 드디어 나타나고 있다"며 "이제 남은 것은 산업을 뒤받쳐 주는 '금융'인데 이 분야도 지금대로만 가면 1~2년 안에 구조조정을 끝내고 제 궤도에 오를 것"이라며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일본 경제의 재생(再生)을 자신했다.

도쿄.에히메.후쿠이=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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