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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52. 남산 제모습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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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9년 5월 하순 어느 날 중앙도시계획위원회가 긴급 소집됐다. 당시 위원이었던 나는 무슨 큰일이 났나 생각하며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회의 안건은 '용산구에 속한 남산 허리께 한남공원 용지 일부를 해제해 외인아파트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주택공사가 고도 1백m의 남산 비탈에 외인아파트를 세우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주공 총재는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면 곧바로 보이는 남산에 고층아파트를 지어 주공아파트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산 외인아파트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인근에 하얏트호텔도 들어섰다.

그러나 주공의 기대와 달리 70년 경부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된 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들어오는 승객의 눈에 남산의 조망을 해치는 외인아파트가 보이면서 "왜 굳이 저 자리에 외인아파트를 지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서울 시민이 남산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남산에는 아파트.호텔.극장 등 경관을 해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시설이 더 이상 들어서지 못했다. 공공기관이 시민의 눈과 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두개 동의 외인아파트가 남산 경관 보호를 촉구하는 경종이 된 셈이었다.

88년 12월 고건 시장이 임명됐다. 高시장은 90년 시정연구관인 강홍빈씨를 불러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을 전개하면 어떨까"하고 물었다. 이에 康씨는 교수.시 공무원 등과 함께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정작 지시를 내린 高시장은 그해 겨울 수서사건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후임 시장들도 남산 제모습 찾기에는 열성적이었다.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의 핵심은 외인아파트 철거와 국가안전기획부 및 수도방위사령부 이전이다.

수방사를 교외로 옮기는 것이 남산 제모습 찾기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수방사는 91년 3월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시의 경계인 남태령으로 이전했다. 남산 수방사터와 그 주변 시유지를 합친 약 2만5천평에는 조선시대 남산골 모습을 재현한 남산한옥마을이 조성됐다. 최대한 원래 지형(地形)을 복원해 전통정원을 꾸미고, 중요민속자료이면서도 관리가 소홀했던 전통한옥을 집단 이주시켰다.

외인아파트 철거는 보상비가 문제였다. 72년 11월 준공된 외인아파트는 16, 17층짜리 아파트 각 한개 동과 아파트 서쪽의 외국인 단독주택 50개 동으로 이뤄졌으며, 부지는 모두 3만1천평에 달했다. 외인아파트 건립에는 땅값.건축비 등 모두 40억원이 들었다. 지은 지 20년 가까이 흐른 90년 철거 보상비로 1천5백35억원이 책정됐다. 보상금을 너무 많이 준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94년 말 이주가 마무리됐다. 50개 동의 단독주택은 포클레인 등 중장비를 동원한 재래식 방법으로 철거됐으며, 두개 동의 아파트는 폭파됐다.

94년 10월 20일 오후 3시 한남로 등 외인아파트 주변 도로를 가득 메운 수만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개 동의 아파트가 차례로 굉음을 내며 폭삭 내려앉았다. 남산 중턱을 22년 동안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가 불과 3분 만에 사라지고 남산의 전경이 드러났다.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있던 남산은 '공포 지대'로 악명 높았다. "남산에 끌려갔대" "남산에서 그렇게 정했대"라는 식으로 한동안 '남산'은 중앙정보부를 지칭했다. 그러나 중정의 남산청사가 남산에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와 모습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서울시는 80년대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을 바꾼 중앙정보부 부지 2만4천평과 건물 41개 동에 대한 보상비로 7백억원을 주기로 안기부 측과 91년 말 계약한 뒤 5년 만에 완전히 인수했다. 그 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으로 쓰이던 안기부의 본관은 현재 서울시 종합방재센터가 들어서 있고, 나머지 건물은 교통방송국 등이 입주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산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어린이회관 등 정리해야 할 건물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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