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지겨운 정치 手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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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지인들과 골프를 쳤다. 1년 전 1백16타(기준타수 44타 초과)를 치던 盧대통령이 그날 90타를 쳤다. 함께 라운딩하던 이해찬 의원,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 등 '한수 위 골퍼'들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하자 盧대통령은 "집에서 거울을 보고 빈 스윙(골프채 없이 하는 동작 연습)을 하루 50개씩 했다"고 밝혔다.

당시 盧대통령이 대중목욕탕 안에서 골프 근육 단련을 위해 상반신을 뒤로 누인 채 팔굽혀 펴기를 하던 모습도 눈에 띄었다고 한다. 고스톱.바둑 등을 하지 않는 대신 골프에 몰입하자 강한 승부욕이 발동했던 것이다.

정치에서도 이런 기질은 드러났다. 종로에서 국회의원을 하던 盧대통령이 '지역구도 해소'를 내걸고 2000년 총선에서 'DJ 민주당'공천으로 부산에서 출마했다. 당시 "무슨 사람이 이렇게 간이 큰지 모르겠다"고 했던 이해찬 의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재신임.대선자금 정국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이 盧대통령의 수에 계속 밀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최병렬 대표가 盧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를 수용했다 철회하거나, 최도술씨 사건으로 촉발된 대선자금 국면도 한나라당에 썩 유리한 상황으로 가지 않는 때문이다. 盧대통령의 얼굴은 최근 무척 밝아졌다는 게 주변의 공통된 전언이다. 유머도 부쩍 늘었다.

청와대 내에선 "이인제.정몽준.이회창씨를 꺾고 올라온 盧대통령에 비해 崔대표는 자신을 버릴 만한 큰 승부를 해본 적이 없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온다. 盧대통령도 "崔대표는 당과 여론을 너무 상전으로만 모시는 것 같다"는 내용의 언급을 참모진에 한 적이 있다. "정치에 급수가 있다면 9단 대 7단 정도의 형국을 읽는 미세한 감각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참모들의 비교도 들린다.

盧대통령은 그러나 이런 전통적 정치 영역의 승부를 즐길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워낙 민감한 정치적 쟁점이 많은 때문인지 요즘 과학기술 분야 보고를 드릴 시간이 이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완충지대가 될 공식적 여당이 없는 상황도 대통령이 한나라당 등 야당과의 직접 충돌을 잦게 만드는 요인이다.

지난주 사석에서 만난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의 서울 특파원은 "盧대통령이 보는 한국과 우리가 보는 한국의 규모가 다른 것 같다"는 지적을 했다. "우리가 보는 한국은 훨씬 큰 나라다. 盧대통령이 주로 여의도를 보고 '수(手)의 정치'를 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이 나오는 자체에 많은 실망감을 느꼈다"며 "내가 느끼고 보도하는 한국은 최근 충남 아산의 삼성전자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7세대 라인 기공식 같은 곳에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승리하든 3金시대식 정치의 수싸움은 이제 '정치과잉'의 지루함, '예측불허'의 피로감을 더하며 그 효용의 한계점에 다가가고 있다. 자기 혁신 없이 정체해 있던 기존 정치권의 고만고만한 승부로 끌어가기엔 이미 우리의 규모와 의식이 훌쩍 성장해 버린 터다. 높이 넓게 보고 실질적 경제.사회 발전에 승부를 거는 정치인이 바로 이 시대의 '큰바위 얼굴'이다. 나라의 최고지도자인 만큼 盧대통령이 먼저 더 마음을 비워줬으면 하는 이유다.

최훈 청와대출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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