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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장|날씨에 웃고 웃는 「하늘의 관상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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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기상청장은 날씨에 울고 웃는다.
「어느 구름에 비가 올지 모른다」는 속담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첨단 과학 장비 앞에 옛말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천변만화 하는 하늘의 속내를 헤아리기란 여전히 어렵다.
특히 멀쩡한 하늘에 장대비가 일쑤인 여름이 오면 기상청장은 「기압골 영향으로 잔뜩 찌푸린」 표정이 되게 마련이다.
『일기예보는 믿거나 말거나』라는 사람들도 최근 레저 붐과 함께 주말이면 「어디에 비 올 확률 몇 %」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더구나 장마·태풍은 국민의 인명과 재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집중호우 또는 태풍의 진로에 대단히 민감하다.
이같은 일기예보의 정확 성부담은 87년 태풍 셀마호 진로 조작을 낳게 된다.
당시 손형진 기상대장 (5대)은 셀마호의 예상 진로를 제주도 남쪽→대한해협→포항 앞 바다로 잡고 『다행히 피해가 거의 없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셀마호는 전남 여수에 상륙, 영호남 지역을 강타한 후 강릉 쪽으로 빠져나갔다.
사망 75명, 실종 1백70명 등 2백45명의 인명 피해와 줄잡아 6백80억원의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남긴 채.
이처럼 엄청난 피해를 남기며 태풍이 내륙 지방을 강타하고 있은 순간에도 기상대는 당초 발표했던 예상 진로도를 고집하며 『대마도를 통과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셀마호가 강릉 지방을 두들기고 있을 무렵에는 『포항 앞 바다를 지나 동해로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상대의 발표만 믿고 재해 대비에 소홀했던 국민들은 불의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잘못 예보 큰 피해>
손씨는 뒤늦게 오보를 시인하고 『태풍의 눈이 사라져 진로 파악이 힘들었다』고 변명했지만 『예상 진로를 잘못 잡은데 대한 중압감이 진로 조작을 낳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손씨는 이 일로 국회에까지 불려나갔다가 이듬해 기상총수의 자리를 물러나게 된다.
손씨는 5년을 재임, 기상 총수로서는 비교적 단명했다.
국립중앙관상대→중앙관상대→중앙기상대→기상청으로 직제가 바뀌면서 현재 박용대 청장까지 6대에 걸친 청장의 평균 재직 기간은 8년.
정부 여느 부처장들의 평균 수명이 1∼2년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장수하는 자리인 셈이다.
전문 기술 직종이다 보니 정치 바람이 닿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가운데 최장수는 초대 이원철씨로 13년을 재직했다.
이씨는 우리 나라 최초의 천문학 박사며 「원철 스타」의 주인공.
견우성이 속해 있는 독수리 좌의 맥동변광성을 세계 최초로 발견, 이름이 별에 붙여진 것이다.
이씨는 미 군정하 문교부 관상국장에서 정부 수립과 함께 국립중앙관상대장으로 취임, 근대 기상관측과 일기예보의 기틀을 닦는다.
이씨는 UNKRA 자금을 끌어내 백엽상과 측우기 수준의 기상관측 장비를 확충하고 전국 14개 측후소에 2개 출장소를 설치, 본격 일기예보를 실시한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창밖에 비가 내리는걸 보고서야 강우를 발표하고 빗방울이 굵어지면 호우주의보를 내리는 식』이었다.
이는 통신 시설의 미비 때문으로 전국 관측소에서 관측 결과를 우체국을 통해 전보로 알려오는 등 시간이 많이 걸려 날씨를 제대로 예측하기란 어려웠다.
서울 중앙우체국의 우체부는 3시간마다 한 차례씩 전문을 들고 자전거로 기상대를 오가는 바람에 「달리는 시계」 역할을 하게 됐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체신부 분소가 기상대 내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일기예보의 어려움은 중국과 북한의 자료가 없어 더 컸다.
우리 나라가 북반구의 편서풍대에 위치, 대부분 기압골이 중국 쪽에서 이동해오는데도 이를 알 수 없어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예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대 국채표씨는 손형진씨가 태풍 때문에 물러난데 비해 정반대 케이스.

<인공 강우 호언도>
5·16과 함께 취임한 국씨는 62년 전례 없는 가뭄이 계속되자 『인공 강우로 가뭄을 해소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씨는 가뭄이 심각 하자 『순리를 거역해 하늘이 노했다』는 여론에 몰려 있었다.
이때 국씨가 최고회의석상에 나가 『인공 강우로 비를 내리겠다』고 하니 당시 박 의장은 「동남풍을 부른 제갈공명」을 만난 심정으로 막대한 예산을 순순히 지원했다.
그러나 국씨는 끝내 인공 강우에 성공하지 못하고 이 계획은 흐지부지돼 해프닝으로 종결됐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 67년 국씨가 정년 퇴임하자 뒤를 이은 것이 구름 (운) 물리학자 양인기씨다.
양씨는 당시 동국대에서 구름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었으며 인공 강우 (자신의 표현으로는 인공 증우)의 1인자였다.
호도 여운이라고 붙였던 양씨는 6대에 걸친 기상총수 가운데 유일한 외부 영입 인사였으나 그도 인공 강우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농업을 위한 것이었다.
60년대 이후 댐의 축조, 농업 용수 개발 등으로 하늘만 바라보던 농사의 시대가 끝나자 일기예보는 재해 예방 및 레저용으로 변모한다.
특히 80년대 들어 일기 시작한 레저 붐을 타고 주말과 연휴, 휴가철의 일기예보는 매우 중요하게 됐다.
4대 김진면씨는 회고를 통해 『연휴 기간의 예보가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몇차례 예보가 빗나갔을 때는 연휴를 망친 시민들로부터 항의·비난 전화가 빗발쳐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마다 「예보는 거꾸로 믿어라」는 식의 불신이 증폭됐고…』라고 술회했다.
최근엔 69년 관악산에 기상 레이다가 설치된데 이어 80년 위성 구름 사진 수신 장치가 가설되면서 관측 장비도 눈부신 발달을 해 예보 방법이 바뀌었다.
『맑거나 흐리고 때때로 비가 오는 곳이 있겠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예보가 84년 손형진씨 때부터는 수치 예보·확률 예보를 도입, 『서울 지방은 맑다가 오후부터 흐리고 밤에 비올 확률 40%』식이 됐다.
그러나 손씨도 청개구리 같은 (?) 날씨 때문에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84년 2·12총선을 앞두고 월간예보에서 『금년 2월은 사상 유례없는 강추위가 될 것』이라고 예보했다가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는 바람에 야당측으로부터 「정치 예보」란 비난을 받은 것.
당시 신민당의 이철승 의원은 지역구인 전주에서 유세를 통해 『현정부가 신당 바람을 잠재우려 강추위라고 엉터리 예보, 유권자들의 유세장 발길을 막고 투표율을 떨어뜨리려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손씨는 예보에 자신이 생기면서 월간예보를 시도했다가 엉뚱한 화살을 맞은 것이다.
한편 양인기씨를 제외한 5명의 기상총수들은 모두가 젊은 시절부터 기상대에 몸을 담고 잔뼈가 굵어왔다.

<기상대서 잔뼈 굵어>
이들은 대부분 물리학 전공 (최근 천문학과가 생김)으로 특수직인 만큼 자리 변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상대도 정치 바람 앞엔 완전히 「무풍지대」일 수만은 없었다.
양인기씨는 5공이 들어서기 직전 국보위의 서슬 퍼렇던 칼날에 「숙정」됐다.
「떡 고물은커녕 떡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자리임에도 과학기술처에 「할당된」 숙정자 머릿수를 채우느라 강제 해직됐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상총수들은 거의 정년을 맞아 퇴임했지만 시기적으로는 묘하게도 정치 변혁기에 위치했다.
2대 국채표씨가 5·16과 함께, 4대 김진면씨는 5공이 들어서면서, 그리고 현재 6대의 박용대씨는 6공과 함께 취임한 것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이 기상대에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 일은 거의 없다.
이같은 인식은 예산 배정 미흡으로 이어져 관측 장비 현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됐다.
요즘 기상청장의 고민은 장마철을 맞아 강우량을 예측하는 일이다.
6월초 『서울 등 중부 지방에 2㎜ 호우』라고 발표했으나 30㎜도 내리지 않아 당혹했었다.
물론 2백㎜ 호우주의보는 사상 최초의 일이다.
첨단 과학 장비를 갖춘 요즘도 이같은 오보는 종종 일어난다.
「관상가가 얼굴 생김새를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듯 관상가는 하늘 생김새를 통해 내일을 예견한다」는 일기예보인 만큼 기상청장은 「용한 관상가」가 되기 위해 하늘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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