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창씨개명(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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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민족의 이름을 존엄시하는 사상은 각별한데가 있다. 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죽을때까지의 호칭이며 죽어서 남는 것도 이름뿐이다.
심지어는 운명을 좌우한다는 역학적 차원까지 이름이 내포하는 의미는 깊고 넓다. 이름은 또 자신이나 그가 소속된 가문의 명예를 상징한다.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느니 「거짓말이면 내 성을 갈겠다」는 말은 이름이 명예를 위한 최고의 담보임을 강조한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집안 어른의 의무요,흐뭇한 긍지이기도하다. 건강과 다복과 부귀공명을 의미하는 한자들이 동원된다. 후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과 기원이 글자마다에 진하게 서려 무게를 싣고 있는 것이다.
성명학 또는 성명철학이란게 그래서 있다. 사람이 건강치 못하다거나 부부사이의 불화,사업의 실패,가난,질병 따위의 불운을 잘못된 작명탓으로 돌린다. 잘못 타고난 사주팔자를 개명으로 1백80도 바꿀 수 있다고도 믿는다. 여기에는 음양오행의 조화와 한자자획의 수리,문자의 의미·운율등 원칙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이름을 붉은 색으로 쓰면 액이 낀다고 해 주술적 금기로 한다. 어른의 이름은 함자라 해 마구 부르지 않고 글자 하나 마다 자자를 붙여 칭하는 예절은 지금도 살아있다.
이토록 뿌리깊은 성명외경사상에 치욕적인 상처를 입힌것이 일제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창씨개명이다. 1936년 관동군사령관이던 육군대장 남차랑이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내선일체라는 미명아래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우리의 성씨를 모두 없애고 일본식 성명으로 바꿀것을 강요했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2할 가량의 국민이 끝내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그중 상당수는 자결로써 항거했다.
지금 대판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자녀들중 4분의 3에 가까운 숫자가 한국식 본명을 숨기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인들 조사에서 드러났다. 반세기만에 재연되는 창씨개명인 셈인데,이번엔 자발적이라는게 다르다.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이 두려워서라고 하니 마음에서 우러난 자발은 아니다. 이들에겐 아직도 일제식민통치는 끝나지 않았다. 설움을 당하는 이들이 모국에 대한 자존심과 긍지로 가슴 펴면서 당당히 본명을 쓸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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