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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근대의 책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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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우리의 진실한 역사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미시사 연구의 중요한 저작 '치즈와 구더기'(카를로 진즈부르그)의 머리에 인용된 글이다. 문학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근대 문학사를 이광수, 염상섭, 이상 등의 기라성같은 작가나 그들의 작품만으로 서술할 때 정말이지 '흥미로운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근대의 책읽기'는 저자들의 문학사가 아닌 독자(讀者)들의 문화사를 복권해 냈다. 1920~30년대 독서 풍경을 그려내면서 이젠 '책'으로만 남은 고전에 당시 독자들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불과 한세기가 지나지 않았지만 20세기 초의 책읽기는 무척 낯설다.

1910년대 도서관을 찾은 이들은 청년 학생들이 아니었다. 도포를 걸치고 갓을 쓴 채 곰방대를 문 노인들이 들어앉아 소리내어 시를 읊는다.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 음독(音讀)의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년대를 거치며 근대적.개인적 독서 방식인 묵독 (默讀)이 급속하게 일반화된다. 입으로 천천히 뜻을 되새기며 완전히 암송해야 할 몇 권의 '경전'만이 중요하던 시대에서, 눈으로 빠르게 읽어치워야 감당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책과 잡지가 쏟아지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0년대 중반 잡지 대여업은 소자본으로 '인텔리 청년'이 할 만한 사업으로 추천되기도 한다.

1920~30년대 다수의 독자가 선택한 것은 염상섭이나 이상의 소설이 아니라 '춘향전' '조웅전' 등의 고전소설이었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더욱이 20년대에 가장 많이 출판된 책은 오히려 족보였다고. 한국의 근대문학이란 그 천재적 작가들의 출현처럼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고, 식민통치는 대중문화라는 유혹적인 무대 위에서 벌어졌다. '구시대'의 가부장적 질서를 강조하는 '주자가훈' 이 서구의 페미니즘 소설 '인형의 집'과 함께 읽히는가 하면, 레닌의 서적이 총독부 수험서와 나란히 광고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여기에 지금 들어도 민망할 만한 '성욕과 성교의 신연구' '남녀 생식기 도해 연구'란 제목의 성(性) 서적들까지 범람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3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근대문학의 '고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중문화의 전성기가 열리자 문단 전체는 통속적인 문예물에서 예술성 있는 '좋은 작품'을 구별해 내야 했고, 이는 '조선문학 명작선집'(1936년)등과 같이 '명작'을 엄선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우리의 '근대문학'이 된다.

이 책은 2001년에 발간된 학술지 '역사문제연구'의 특집 '1920~30년대 독서의 사회사'에서 비롯된다. 당시 연구진에게서 '연애의 시대'(권보드래 지음, 현실과문화연구)와 천정환씨의 '근대의 책읽기'가 나온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들도 있지만 다소 전문적인 독서를 요한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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