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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아야 살아남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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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다양한 전공자가 뒤섞이고 어우러져 공부하는 분위기라면 서울의 연구집단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빼놓을 수 없다. 한 강좌의 강사가 다른 강좌에서 수강생으로 변신하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 '수유+너머' 탄생을 주도했던 고미숙 박사는 요즘 '시경 강의' '뇌과학'등 네 강좌의 수강생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화여대는 또 어떤가. 이 대학 최재천(동물행동학) 교수는 아예 '학제'를 넘어서는 '통섭(統攝)'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통섭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하는 신조어. 최 교수는 지난해 9월 학내에 '통섭원'을 설립해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정민(한양대 국문학).한경구(국민대 국제대학원).이덕환(서강대 화학).조택연(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등 전공만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학자들이 최 교수와 함께 '학문 넘나들기' 실험에 열중하고 있다.

물론 학제나 통섭이 중요하다 해서 한 우물을 깊이 파는 작업이 더 이상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공 분야를 치열하게 갈고닦는 자세는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다. 그러나 지금은 '한 우물 파기'에 머물지 않고 이웃 우물, 나아가 멀리 떨어진 동네의 우물들과도 소통해야 하는 시대다. 전공의 벽이 무너지고, 남의 우물에도 한눈을 팔아야 경쟁력이 유지된다는 인식은 선진국에선 이미 보편화됐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역시 대학보다는 기업들이 더 발 빠르고 민감한 것 같다. 최재천 교수는 최근 한 대기업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의 휴대전화를 개발하려고 하는데, 함께 연구할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받았다. 그 기업이 최 교수와 '통섭'하고 싶어 한 것은 '동물들은 어떻게 신호를 주고받는가'였다. 새 휴대전화의 컨셉트를 고민하다가 동물들의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과 동물행동학자인 최 교수를 동시에 머리에 떠올렸던 것이었다. 삼성전자에서 첨단 휴대전화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사용자 경험(UX)'디자인그룹의 연구원들은 디자인 전공보다는 심리학.사회학.인류학.인간공학.음향공학 등 얼른 보면 휴대전화와 무관해 보이는 전공자들이 더 많이 포진해 있다고 한다. 기업들은 이미 '한눈팔아야 살아남는다'는 원칙을 다방면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 교수는 "한국에서 제일 열심히 하고 잘난 조직은 역시 기업이다. 학계도 구태의연한 칸막이 속에 안주하지 말고 이런 기업들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언제까지 생물학자는 생물학만 하다 늙어 죽고, 사회학자는 강의실에서 평생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해야 하는가"라고 외친다.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대학도 이제부터 당당하게 한눈을 팔자고 권하고 싶다. 그동안 한 우물을 판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주변에 마음껏 한눈을 팔아서 새로운 퓨전학문, 새로운 개념의 휴대전화를 우리 손으로 탄생시켜 보자. 통섭은 세계적인 추세다. 한국인은 비빔밥을 만들어 전 세계에 유행시킨 민족이다. 뒤섞고 비비고 넘나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우리 학계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