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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평축」 참가로 절정|5기 출범 전대협 변천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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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전대협이 1, 2일 부산대에서 전국 1백79개 대학 4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기 출범식을 성대히 치르고 앞으로의 투쟁 방향 등을 천명했다.
85년 전학련, 86년 전민학련·애학투 등 전국적인 학생 조직을 자처하는 여러 단체가 나타나 활동해왔으나 전대협 만큼 긴 생명력을 유지해온 경우는 없었다.
전대협 1기부터 5기까지 각각의 투쟁 활동 등을 정리해본다.
◇1기 (의장 이인영)=87년6월 항쟁의 성과인 대통령직선제에 대비, 「민주 정부」 수립을 목표로 87년8월19일 출범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가 동시에 출마, 대권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자 12월9일 김대중 후보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대규모 「공정 선거 감시단」을 구성, 투·개표 과정을 지켜보는 등 조직적인 선거 감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대협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후보 단일화파·민중 후보 지지파 등으로 사분 오열됐다.
이는 대표자들만의 다수결로 비판적 지지 입장을 밝혔으나 학생 대중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취약한 조직력에서 야기된 당연한 결과였으며 따라서 선거에서 패배하자 전대협은 와해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2기 (의장 오영식)=대선 패배를 극복, 조직을 재건하고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과제 아래 88년5월 출범했다.
6·10, 8·15 남북 학생 회담을 제안해 금기시돼 왔던 통일 논의에 물꼬를 터 대선 패배로 침체된 운동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 결사대」를 조직해 서울 연희동 일대에서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여 전전대통령의 백담사은둔에 큰 영향을 미쳤다.
◇3기 (의장 임종석)=출범하자마자 평양 축전 참가를 천명하는 등 정부의 통일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으며 강령·규약을 새로 제정하고 중앙집행국·정책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전대협 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
평축 개막식에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양이 참석, 정국을 초비상 사태로 몰아갔고 통일 추진창구 단일화 논쟁을 촉발시켰다.
평축 참가 투쟁으로 수배된 의장 임군은 10개월 동안 붙잡히지 않고 「망명 전대협」을 이끌어 「임길동」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때부터 중앙 조직이 강화되고 서울 지역 외에 부산, 대구·경북, 전남 지역 학생 조직이 급성장해 전대협이 명실상부한 전국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4기 (의장 송갑석)=민자당 창당에 따른 위기의식에서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더욱 확산돼야한다는 당위성과 광주 항쟁 10주기라는 상징성을 과시하기 위해 송군이 지방대생으로는 처음으로 의장을 맡았다.
정국을 보혁 대결 구도로 규정, 「민자당 해체 투쟁」을 시작했으며 범민족대회에 적극 참여해 정부의 북방 정책에 맞섰다.
그러나 운동의 중심이 여전히 서울 지역에 있었던 만큼 송군이 광주·서울 등을 오가며 전체 운동을 지도하는데 한계가 드러나면서 상대적으로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기 (의장 김종식)=강경대군 상해 치사 사건에 따른 학생·재야 운동권의 결집력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대 정부 공세를 벌여 광역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에 일격을 가한 뒤 92, 93년의 총선·대선에선 반드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전략 아래 현재의 협의체 조직을 「전국 대학생 총 연맹」 (전총련)이란 연합체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려하고 있다.
전총련은 총장 선출 등 대학별 문제에도 소속 전체 대학이 통일적으로 대응, 더욱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겠다는 의도.
이와 함께 통일 투쟁을 계속, 기필코 연방제 통일 방안을 관철시킨다는 방침이나 최근 북한이 유엔 가입을 선언해 당황하고 있다. 【부산=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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