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가정폭력 계속 두고 볼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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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가정 폭력=범죄'라는 지속적인 홍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아내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이찬씨의 아내 폭력 사건이 보도된 지 보름 남짓 지나면서 사람들은 벌써 식상해한다. 인터넷 누리꾼들의 댓글도 처음엔 '그럴 수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았으나 지금은 '자기들만의 문제로 왜 다른 사람 피곤하게 하느냐'는 반응으로 돌아선 느낌이다.

우리 사회 어디를 가나 폭력이 넘쳐흐른다. 목적을 위해 폭력적 수단까지 불사한다. 학교나 집.직장에서 폭력적이고 거친 말과 위압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받아들여진다. 청소년들의 대화는 반 이상이 욕으로 채워져 있고 여섯 집 중 한 집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폭력 행사를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왜 용납되는 것인가.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가장 염려되는 것은 가정 폭력을 용인하거나, 심지어 폭력이라고 느끼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런 집단 불감증과 무의식으로 우리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 편이 되는 것이다. 폭력에 익숙해져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가해자 입장에서 상황을 해석한다면 피해자에게 제2의 폭력을 가하고 폭력 행사를 방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가해자와 공범이 되는 것 아닌가.

가정 폭력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가정 폭력은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폭력은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황폐화해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케 만든다. 가정 폭력에 대한 인식이 지금 같아선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마침 올해는 민주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사회 각 부문이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개인의 삶과 일상생활, 의식과 문화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가정 폭력은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약자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인권감수성)을 키우고, 폭력을 방조.조장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는 과정이 제2의 민주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걸음은 폭력 행위자를 적합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아동 교육에서도 옳고 그름과 해서 될 일과 안 될 일을 분명히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동물을 훈련할 때도 마찬가지다. 폭력 행위자의 폭력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폭력 행위는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고, 폭력을 행사하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정 폭력 방지 및 처벌법'은 아내 폭력을 범죄로 보지 않고 부부 갈등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폭력 행위자를 처벌하기보다 신속히 가정으로 돌려보내 가정을 유지하는 것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폭력 행위자가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기소유예해 주려는 제도를 실험하고 있다.

여성의전화는 폭력 행위자를 적절히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현재의 법을 대폭 수정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1년이 넘도록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가정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미룰 명분도 없다. 국회는 조속히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바란다.

박인혜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