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 대사|5공 때까지 내정에 깊숙이 간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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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주한 미국 대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건국 초기 미국 대사에게는「한국의 총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식됐고, 그 이후로도 미국식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비쳤다. 이것은 카터의 인권외교로 이어지고, 5공 때까지도 미국 대사는 한국의 대통령에게 개헌을 요구할 정도로 내정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더 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통상·실리 외교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대외 정책이 바뀌어온 탓도 있겠지만 한국 정부의 내적·외적 위상이 바뀌고 있는 원인도 크다.
무엇보다 건국 초기 미국이 제공하던 무상 원조가 없어졌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경제에는 커다란 변수여서 한국의 통치자에게는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무상원조라는 무기보다는 미국 중심으로 구성된 우리 경제의 통상 문제를 틀어쥠으로써 또 다른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또 한가지는 주한 미군의 존재다. 미국은 2차대전이 끝날 때부터 한국을 대소 전진 기지로 삼아왔지만 6·25이후 한국은 미국의 방어력이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군마저 이제 단계적 철수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 때문에 유사시의 미군 개입을 보장할 장치들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압력에 한국이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은 그동안 정권의 정통성이 국민들로부터 의심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임제 실현과 직선제 대통령 선거로 이부분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거의 없어졌다.
한가지 모순된 것은 상당수의 한국인이 미국의 내정 간섭을 비난하면서도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해 국내 정치 문제와 관련한 압력을 넣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많은 한국 정치인들은 미국 대통령 만나는 것을「은혜」를 입은 양 자랑하기도 한다. 미국 대사 시절 한사람은 사석에서『그렇게 미국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왜 미국 대통령을 만나지 못해 안달하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우리의 북방 정책이라는 것도 사실은 미국과의 협조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변 상황의 변화들이 미국 대사의 활동을 제약하기도 한다. 주한 미 대사는 이제까지 관광진흥공사에서 주한 대사들을 초청해 국내 관광을 하는데 한번도 참석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소련 대사가 참석하면서 미국 대사도 이번에 처음으로 경주행 여행에 동참했다.
그렇지만 미국 대사는 아직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주미 한국 대사의 경우 미리 약속해놓고 기껏해야 차관보를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다른 어느 나라 대사들과도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한 미국 대사의 경우 외무부장관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많다. 그것은 다른 나라 대사와는 다른 독특한 위상이다. 한미간에 만들어진 4인 위원회도 미국 측에서 주한 미 대사와 주한 미군사령관이 나오는데도 우리측에서는 외무·국방장관이 참석한다. 미군 사령관의 상대역도 국방장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통령도 2∼3주에 한번정도는 테니스 또는 만찬에 미국 대사를 초대한다. 외무장관까지 제쳐놓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만 상대했던 과거의 대사에 비하면 상당히 개선된 것이지만「정치적 타결」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실무자 위주로 계산된 행동만 하는 일본에 비교할 때 우리 외교실무자들이 불평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와 함께 상당수의 한국인에게 의문으로 남는 것은 CIA출신 대사의 기용이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국민들의 성숙도가 높아져 감에 따라 젊은층에서부터 반미구호가 공공연히 외쳐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대한간섭방법이 좀더 은밀하고, 정교해진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현재의 그레그 대사도 공개적인 연설에서는 과거 대사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국내정치문제는 언급을 삼가고 있지만, 사석에서는 차기 대통령후보로 누구는 부적절하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는 후문도 있다.
80년 광주사태이후 미국 대사들은 재야를 포함한 각계각층과의 접촉을 빈번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워커 대사가 정부인사만을 접촉했다는 국내 재야 세력의 반발을 고려한 행동이겠지만 외국 대사의 활동범위로는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주한 미국 대사는 서울의 대사관과 부산의 영사관, 서울·부산·대구·광주에 있는 4개의 문화원 등 공관 외에도 주한 미군이 지휘하에 있다. 여기에 미국기업들의 진출 현황까지 감안하면 거대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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