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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공 초기 문인-언론인 목줄죄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한수산씨 전화번호와 집 주소 좀 알려주십시오.』
1981년5월27일 오후 중앙일보 문화부로 작가 한수산씨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보안사 누구라고 밝히는 전화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사무적이었다. 당시 한씨는 중앙일보에 소설『욕망의 거리』를 연재중이었다. 전화가 있은 이튿날인 28일 중앙일보 편집국 장대리 문화부장 손기상씨가 신문사에서 연행됐다.
한씨의 거처를 묻는 보안사의 전화에 이어 손씨가 연행되자 당시 편집위원으로 문화부 데스크를 맡았던 정규웅씨는 연재소설에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챘다. 어떤 부분이 정권에 거슬렸을까. 정씨는 신문을 뒤적이며『욕망의 거리』몇회분을 다시 읽어봤다.
「어쩌다 텔리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 서면 다 잊을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 사정을 보고 들어주는 게 황송스럽기만해서…」
「하여튼 세상에 남자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종류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일을 하는데 있어 힘이 넘치고, 그리고 무디지 않은 예리함이 있어 좋았던 남자에게 다른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무자비함이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데는 한치의 감정도, 흔들림이 없는 그 무자비함.」
죽은 한 여자와 기업체 수위, 그리고 야망에 가득찬 젊은이를 표현한 이 같은 대목을 발견하고 그는 아차 싶었다. 5공 수립전까지 이어지던 계엄사 검열에서라면 가차없이 잘릴 부분들이었기 때문이다.
80년 5월1일부터 연재된 이 소설은 당시의 계엄사 검열에 의해 얼마나 많이 잘려나갔던가. 혹독했던 검열을 염두에 두고 사회나 역사의식과는 멀찍이 떨어져 산문시와 같은 언어로 사람과 죽음의 미학을 그려내고 있는 한씨를 필자로 택했음에도 불구, 작품 내용과는 상관없이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부분부분 드러냈던 그들 아닌가. 비록 계엄사 검열은 사라졌다 하더라도「사회정화」란 이름으로 권력이 서슬을 시퍼렇게 세우고 있던 5공초였기 때문에 정씨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튿날인 5월29일 오전 정씨는 신문사 동료 2명과 함께 신문사에서 연행됐다. 동료 2명은 당시 중앙일보 출판국 권영빈 부장과 이근성 기자. 그해7월31일로 연재가 끝날『욕망의 거리』를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중앙일보 출판국은 한씨와 교섭하고 있었다.
이날 비슷한 시간, 한씨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됐다.『해빙기의 아침』『밤의 찬가』 『부초』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잇따라 내놓으며 인기절정을 치닫던 한씨는 연재나 출판 유혹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고독한 상태에서『욕망의 거리』집필에만 몰두하기 위해 80년6월 제주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들 외에 허술·박정만씨도 연행됐다. 각기 다른 출판사에 근무하던 이들도 출판계약을 하기 위해 한씨와 교섭한 적이 있었다. 서빙고동 속칭「빙고하우스」에 연행된 이들 7명은 그곳에서 3∼5일간 악몽 같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고통과 인격적 모독감이 든 때는, 그래도 행복한 상태. 인격도 뭐도 아무 것도 아니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 우선은 살고 봐야겠다는, 그야말로 비굴한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렇다 할 사상성이나 배후조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잠도 안 재우고 무작정 고통을 준 후 그들은「밖에 나가 이 일을 발설할 경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음」이란 자필 각서를 받고 풀어줬다.
어찌나 심했던지 7명중 몇명은 제대로 걸어 나오지도 못하고 업혀 나와 병원으로 직행, 입원해야만 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들은 그야말로 주눅든 상태에서 당분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한수산 소설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지식인들을 가두고 고문, 그중 몇명은 다리가 부러지고 정신 이상자가 됐다』는 등의 북한에서 날아온 것 같은 삐라를 집 앞에서 주운 한 사람은 당한 자로서 그것을 기관에 신고했고 대부분이 얼마간은 술과 방황으로 보내야할 만큼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한씨는 일본으로, 박씨는 저승으로 떠나야만 했다.
5공 최대 필화사건으로 기록되는 한수산 필화사건. 문화인·언론인을 뚜렷한 이유 없이 끌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문단은 크게 세부류로 형성돼 있었다.
현실의식을 바탕에 깔고 문학을 통한 참여를 내세우는 참여 문학 진영과 그와는 반대로 문학의 고유 영역을 지키려는 순수 문학 진영, 그리고 그 양측 어디에도 끼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던 문인들. 이중 세번째 문인들 부류에 한씨도 끼여 있었으며 70년대 중반부터 독서시장을 석권한, 이른바 인기작가 대부분이 셋째에 속하고 이들은 각 일간지에 연재소설을 쓰는 등 독자들에게 큰 영향력이 있었다.
활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치밀하고도 섬세한 묘사로 인기를 끈 이 작가들의 바로 그 인기를 끈 묘사가 문제였다.
그 표현 부분 부분들이 권력층을 비아냥거리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문학진영의 주요 문인은 이미 80년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끌려갔고, 이제 그 매가 인기 작가에게 떨어진 것이다. 일벌백계로「인기작가들도 까불지 마라」고 본때를 보인 것이 한수산 필화사건이다. 물론 그 본때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5공초 밀어 붙이기식 억압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침묵하는 다수의 지식인들에 가해진 정치적 테러로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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