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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포레스트 검프처럼 앞만 향해 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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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킴(52), 한국이름 김명천.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 서부지역본부 부본부장. 계급 커맨더(commander).

동료.부하는 그를 '렙롸일렙' 이라고 부른다. 미국 군(軍)이나 경찰이 행군할 때 외치는 '레프트(left), 라이트(right), 레프트(left), 라이트(right)'(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구호를 빨리 외칠 때 나는 소리다. 그는 "앞만 바라보고 간다는 뜻에서 생긴 별명"이라고 설명했다. 이력을 보면 왜 그런 별칭이 붙었는지 설명이 된다.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족과 함께 이민, 페퍼다인대와 대학원을 우등으로 마치고 미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소령으로 예편한 뒤 LAPD에 순경으로 들어가 마약.강력 수사 형사로 활동하며 행정학 박사학위를 땄다. 승진을 거듭하며 LA의 항만시설이 있는 하버경찰서장 등을 지내고 지난해 '별'을 달았다. 9천명이 넘는 LAPD 경찰관 중에서 국장.부국장 다음 계급인 커맨더(한국의 경무관급)에 오른 것이다. LA에서 아시아계가 커맨더가 된 유일한 사례다.

그는 흘러간 과거를 되새기는 걸 싫어했다. '앞만 보고 행진하는' 스타일이다. 몇 차례 '과거사'를 물은 끝에 순탄치 않은 초년 시절이 있었고, 이를 이겨내려는 의지가 발동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북 출신인 그의 부친은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옛 화신백화점(현 국세청 자리) 건너편에 병원을 개업해 명성을 날렸다. 집은 서울 장충동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 박근혜 의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동네 친구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가 이민을 결정했다. 세브란스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야전병원에서 일했던 부친이 미국 의사 친구들의 권유로 짐을 싸기로 했던 것이다. 남부러울 게 없던 집이 왜 갑자기 그런 모험을 시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튼 15세 소년은 형.누나.여동생과 함께 1967년 LA땅을 밟았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미국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때부터 좀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만 말했다.

가족사는 그게 끝이었다. 그는 대신 '현재'를 말했다. 형은 2년전까지 미 육군병원 간부로 일하다 대령으로 전역했고, 누나는 베틀을 이용한 수공예의 장인(master)이 됐고, 여동생은 시집을 네 권이나 낸 뉴욕대 영문학과 교수가 됐다는 자랑이었다.

'커맨더 킴'은 지난달 20일 한국에 왔다. 36년 이민 생활 중 두번째 고국 방문이었다. 95년 광복절 행사 때 정부 초청으로 며칠간 머문 뒤 8년 만이었다. "너무 뜸한 거 아니냐"는 질문에도 그의 스타일다운 답이 돌아왔다. "주당 평균 80시간을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승진 준비하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20년 연하의 변호사 부인 임계영씨였다. 그는 "이혼을 한번 했다"고 말했다. 관심을 기울이자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경찰 이야기가 시작됐다. 경찰의 날(10월 21일)을 맞아 경찰청 초청으로 온 그는 연일 강연을 했다. 경찰청.경찰대.서울경찰청.제주경찰청. 전남경찰청 등을 돌았다. 경찰에 대한 그의 첫마디는 "경찰은 명예직이다"였다. "목사.신부가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이지 결코 돈 버는 일이 아니다"고 했다. "경찰 생활을 해오며 내가 가장 만족감을 느꼈던 때는 승진했을 때도, 상을 받았을 때도 아니었다. 남들이 나에게 고마워할 때가 제일 뿌듯했다"는 말이 뒤따랐다. 그는 "하루에 한번이라도 남에게 좋은 말을 하거나 도움되는 일을 해서 상대방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결코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는 말이 나올 수 없다"고 장담했다.

그는 경찰관이 된 이유에 대해 "멋있어 보여서"라고 답했다. "군 신체검사장에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징집관들이 다 와 있었는데 그 중 해병대 군인이 가장 멋있어 보여서 해병대에 들어갔고, 그 뒤로는 범인 잡는 경찰관들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찰관이 돼보니 '폼잡는' 직업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웃에 봉사하는 일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경찰에겐 사회를 컨트롤하는 힘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돼보니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건.사고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나고, 범인을 잡는 것도 맘대로 안 됐습니다. 모든 일이 예측불가였고, 시민의 제보나 도움으로 해결되는 일이 대다수였습니다. 시민의 힘이 절대적이고, 나는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종차별 문제도 물어봤다. 대뜸 영어가 나왔다. "That's not my problem(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인종차별은 나의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싫건 좋건 있는 일이다. 그건 그들의 문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 그만이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일 동포 사회에 대해서는 "이제는 '셋방살이' 의식을 버리고 주인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나 경제력 면에서 미국 사회의 어엿한 추축이 됐는데 변방에 있을 때의 행동 양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LAPD에도 한국계가 2백명 가까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밀린 일을 걱정하며 일터로 돌아갔다. 그의 별명 '렙롸일렙'을 떠올리게 하는 힘찬 걸음으로 공항을 향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내가 한국의 경찰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글=이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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