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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원전 직접 번역 플라톤 전집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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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정암학당 운영 실무를 맡은 김인곤 책임연구실장(左)과 방학 중인데도 원전 강독을 위해 모인 학당 연구원들.[이은정 인턴기자]

서양철학의 뿌리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드디어 우리 말로 만난다. 그것도 영어판이나 일어판의 중역(重譯)이 아닌 그리스 원전 모두를 옮긴 것이다.

번역은'고대 그리스철학 원서 강독'모임인 정암학당(학당장 이정호 방송통신대교수)이 했다.출간은 철학전문으로 정평이 난 이제이북스(대표 전응주)가 맡아 2010년까지 34권을 펴낼 예정이다. 10년에 걸친 마라톤 연구의 결과물로, 전집의 규모나 기간으로 보아 우리 학계와 출판계의 역량을 보여줄 '대장정'이다. 3월 초 1차분으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알키비아데스Ⅰ.Ⅱ'를 비롯해 '뤼시스''크리티아스''크라튈로스' 네 권을 우선 선보인다. 이 중 '크리티아스'는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를 처음 언급한 책이어서 눈길을 끈다.

"한국철학은 수입 철학이에요.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만든 것이니까요. 원전을 한국어로 옮기면서 한국인의 정신으로 고심해야 학문적 역량이 쌓이는데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던 거죠. 게다가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플라톤 전집이 없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죠."

원전 번역을 주도하는 정암학당의 '훈장' 김인곤(49) 박사는 후련한 표정이다.

정암학당은 회원 20명 대부분이 철학 석.박사인 서양철학 연구모임. 이들은 고대 그리스 플라톤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아'의 공동작업과 같은 방식으로 플라톤을 번역했다. 원전을 나눠 한 사람이 번역해 온 것을 다른 연구원들이 한 줄 한 줄 함께 읽으며 엄격한 토론을 통해 검증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용어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책마다 두세 차례 윤독을 통해 번역의 질을 담보했다. 이 결과 기존 플라톤 번역서에서 일률적으로 '덕'이라 옮기던 아레테(arete)를 문맥에 따라 '탁월함' '훌륭함'으로 옮기는 등 성과를 있었다고 한다.

정암학당은 원래 전공자 몇 명이 모여 열던 플라톤 강독회를 2000년 이정호(56) 방송통신대 교수가 확대했다. 선친이 남긴 유산을 털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원서 강독도 병행하는'학당'으로 발전시킨 것. 강독회 참여자는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배운 경우도 많지만 의욕만 있다면 초심자도 환영한다는 것이 김 박사의 설명이다. 강독회의 밀도는 높다.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2번 3시간씩 책을 읽고, 방학 때는 강원도 횡성에서 1주일간 합숙하며 하루 12시간 이상 원서와 씨름한다.

단지 학당 운영이 쉽지는 않단다. 이 교수가 출연한 사재 말고는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탓이다. 학당의 실무를 책임진 김 박사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인프라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수익성이 낮은 고전 원전 번역 등을 학계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정암학당은 플라톤을 '정복'한 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 도전할 계획이다. "산에 오르는 기분이에요. 지금 우리의 노력을 바탕으로 후배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그 이상의 단계로 뛰어넘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사장은 "플라톤의 저작은 비교적 쉬운데다 1차 출간분은 고등학생도 읽을 만큼 쉽다"며 "이번 출간이 철학 대중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일반 철학서적과 달리 문고판으로 제작하여 가격을 낮추고, 일반인들도 보기 쉽도록 편집했다고 한다.

"언어는 언어 속의 세계 그 자체를 보여 준다"는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한국인의 언어로 녹여낸 플라톤 전집 완역본이 우리 학계의 수준을 높이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지 두고 볼 일이다.

김성희 기자.이에스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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