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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에게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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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전.현직 두 주석은 이구동성으로 측근들에게 "강희제를 배우라"고 했다. 전 총리 주룽지(朱鎔基)는 "강희제의 통치철학과 수신제가의 지혜가 중국사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극찬했고, 중국 최고위급 관리들 사이에서는 "신중국 건설을 위해 강희제를 배우자"는 붐이 일었다. 중국 관영 CC-TV에서는 강희제의 치세를 다룬 '강희제국'을 황금시간대에 방영해 '강희열풍'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왜 강희제일까?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로부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 황제는 모두 220여 명이다. 그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제위에 있었던 사람은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다. 무려 61년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리만 차고앉았던 군주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만주 일대를 평정한 뒤 2대 태종 홍타이지를 거쳐 3대 세조 순치제에 이르러 베이징을 접수한 것(1644년)은 분명 '기적'이었다. 하지만 접수와 이끎은 다른 것! 15만 명의 만주족 팔기군이 주축이 돼 세운 청나라가 1억5000만 명의 한족을 이끈 것은 '기적 이상'이었다. 더구나 '강건성세(康乾盛世)' 즉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3대 133년간의 역사상 유례없는 전성기를 연 것은 강희제의 '믿을 수 없는 리더십(incredible leadership)' 덕분이었다. 실제로 '강건성세'는 로마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5현제시대(96~180년)'보다 길었다.

당시 강희제가 이끈 청나라는 국부(國富) 면에서 태양왕 루이 14세의 프랑스보다 앞섰고 나라의 판도 면에서도 표트르 대제가 이끈 러시아에 버금갔다. 강희제는 그의 치세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의 최고경영자(CEO)로 61년을 이끈 셈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강희제의 좌우명은 '국궁진력(鞠躬盡力)'이었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구부린다는 뜻이고 '진력'은 온 힘을 다한다는 의미다. '국궁진력'은 모든 것과 구별되고,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 황제가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국궁진력'을 좌우명 삼은 강희제의 리더십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지도력'의 전형이었다.

강희제는 백성들이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맘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것'을 통치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그리고 '다스리지 않는 것 같은 다스림(不治而治)' '시끄럽지 않은 다스림(無爲之治)'을 견지했다.

강희제는 죽기 5년 전인 1717년에 쓴 '고별 상유(上諭)' 즉 '미리 쓴 유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의 세금을 낮춰 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잘 다스리고, 관대함과 엄격함의 조화를 이뤄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자고로 '위군난(爲君難)'이라 했다. 군주가 됨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강희제가 말하고 그의 아들 옹정제와 손자 건륭제가 이어받은 천자의 원칙처럼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오직 나 하나의 책임이다." 남 탓하고 제도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