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림칙한 대소경협/문창극 워싱턴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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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련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빚을 준 입장에서 혹시 우리 돈을 떼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달 초 부시 미 대통령은 소련이 미국산 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미 정부에 요청한 15억달러의 지불보증을 거절했다.
이유는 소련 정부가 이 돈을 갚을 만한 재정상태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곡물을 수출해야 미국 농민이 덕을 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나 소련이 이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을 섰던 미 정부가 은행빚을 갚아주어야 하고 이 돈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따라 미 CIA는 상하원 합동경제위원회 청문회에다 『소련경제가 지금 해체과정에 있으며 역사적인 파국국면의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불길한 전망과 병행해 소련경제가 얘기될 때 마다 꼭 한국이 거론되는 것도 빚을 준 입장에서 유쾌하지가 않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얼마전 소련 경제를 다루면서 소련이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경제지원을 기대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꿩대신 닭 격으로 한국에 기대고 있다면서 그러나 한국의 경제력으로는 소련경제를 회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소련의 이같은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돈을 빌려주는 나라는 서방세계에서는 「한국 뿐」이라는 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소련의 간곡한 간청으로 생필품 구입을 조건으로 미국 정부가 지불보증해준 금액은 10억달러가 전부였다.
이에 비해 우리는 이미 30억달러를 지원키로 했으며 지난번 정상회담에서 추가지원을 약속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어 주목을 받는 것 같다.
물론 유엔가입문제,북한의 설득 등 우리 정부로서는 소련의 도움이 필요한 줄은 알고 있으나 세계의 모든 부자나라들이 빚을 주기를 꺼리는 마당에 우리만 발벗고 나서고 있는 것이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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