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머리로 생각할 때다/송복 연세대교수·정치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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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생들에게 보내는 고언
지난달 26일 한 학생의 치사이후 학교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급기야는 이 학생의 죽음을 강의실에서 언급한 한 저명교수마저 강단을 떠나고 말았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그리고 한 지식인으로서 이 시대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연세대 등 많은 교수들이 민주변혁 내각총사퇴를 요구하는 시국성명문을 잇따라 내고,또 어느 지역에서는 가두침묵시위까지 하고 있다.
학교바깥을 향해 소리치기는 쉽고,심지어 그 바깥의 힘센 세력과 대항해 싸우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어렵고 더 고통스런 일들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학교바깥이 아니라 학교안의 일이다. 더 명백히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내 소신껏 가르치고,내 소신껏 의견을 말하고,그리고 내 소신껏 꾸짖는 일이다.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그 교수의 글에서처럼 오늘날 대학안에서 이 「소신껏」이라는 것이 되고 있지 않다.
밖을 향해 그렇게 소신껏 과감하게 주장하는 그 어느 교수도 학생을 향해 학생들의 잘못을 자기 소신껏 꾸짖는 교수는 없다. 학생들을 보고 「잘한다」「용기있다」「어른들이 못하는 것을 너희들이 하고 있다」는 소리는 어느 교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의 잘못을 기탄없이 꾸짖을 수 있는 교수는 지금 대한민국 안에는 없다.
이 점을 오늘의 대학생들은 깊이 숙지하고 숙고해야 한다. 어째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학생을 소신껏 꾸짖을 수 없는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교수에게 잘못이 있다면 교수에게 용기가 없다는 것 뿐이다. 이 시점에서 어느 교수도 학생에게 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 이유는 「그 학생들」과 대화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하든 당하지 않든 말이 통해야 이해가 형성된다. 서로간에 말이 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교안에는 대자보만 난무한다. 어느 벽이든 비난 욕설이 붙지 않은 벽보가 없다.
말이 서로 통하고 있지 않기때문에 학생들로부터 강제로 머리를 깍이고 구타까지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심지어는 「그 교수 매좀 맞아야겠어」 소리가 학생들 입에서 막무가내로 나온다.
자기 선생으로부터 엄하게 꾸지람을 듣지못하는 학생,그 학생은 불행한 학생이다.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채찍을 받아보지 못한 자식,그 자식이 불행한 것과 마찬가지다. 왜 이 불행을 이 시대의 학생들은 자초하고 있는가. 그것은 학생들이 역사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60년 이후 30여년 동안 어느한해고 학생시위를 겪지않은 때가 없다. 그런데 역사는 어떻게 됐는가. 4·19 이후의 그 격렬한 시위 다음에 무엇이 왔는가. 왜 그 시위학생들 요구와는 정반대의 역사가 흘러갔는가. 학생들 말대로 왜 반민주세력이 창궐하고 군부가 등장했는가. 60년대 중반이후 그 「무더운 여름날」의 시위 다음에는 또 무엇이 왔는가. 왜 우리는 긴급조치 9호밖에 생각나지 않는 그 유신시대를 경험해야 했는가. 그리고 80년의 봄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이 왔는가.
○꾸짖지 못하는 교수
왜 역사는 그토록 학생시위와는 정반대로 펼쳐져 갔는가. 학생들의 의지를 가장 자유로이 펼수 있었던 80년대 후반. 87년의 그 「6월항쟁」을 치르면서도 6공화국은 왜 학생들의 요구·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었는가. 역사는 어째서 장장이 그렇게 다르게 전개돼 갔는가.
그 이유는 60년대 이래 학생들 요구와 국민들의 요구가 내내 달랐기 때문이다. 지엽말단만 일치하고 주류는 내내 불일치했기 때문이다. 가슴은 뜨겁다 해도 머리는 식혀져 있어야한다.
그 식혀진 냉철한 두뇌로 어느 역사를 돌아보라.
「인민의 바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 「인민의 바다」­국민의 요구라는 바닷속에 수용되지 못하는 학생들의 그 어떤 외침도 의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현은 되지 않는다. 그 외침이 그 어떤 절규로 바뀌어도 역사적 현실과는 언제나 거리가 멀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들 학생들의 그 과격한 시위가 민주화의 실현을 재촉했다고 긍정한다.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그 끊임없는 시위가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민주화를 늦추었다는 가설도 세워 볼 수 있다.
「역사는 가설을 필요로하지 않는다」지만,그 기나긴 시위에도 「민주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거꾸로 그 시위때문에 그 민주변혁이 안되고 있다는 가설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가설이 입증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문제는 왜 학생들 요구와 국민들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 요구가 본질적으로 서로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시위학생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실현하려고 하는 것,그것은 혁명이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그 숱한 모순들을 학생들은 혁명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혁명이냐 개혁이냐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다. 국민은 혁명을 원하지도,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혁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혁명을 외치면 외칠수록 국민들은 보수로 회귀한다. 학생들이 변혁을 갈구하면 할수록 국민들은 더욱 안정을 희구한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시위는 학생들이 가장 반대하는 세력을 지원해주는 것이 되어왔다. 그래서 지난 30년간의 학생시위는 민주화를 촉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세력에 승리를 안겨다주는 가장 큰 동인이 됐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지난달말 이후 학생들이 하고 있는 요구도 지난 30년래의 그 요구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어떻게 30년동안 그렇게 같아질 수 있는가. 시종일관 정권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리고 특정정당을 해체하라고 한다. 어떻게 정권을 내놓고 어떻게 정당이 요구대로 해체될 수 있는가. 「내각을 사퇴해라」「폭정을 중단해라」는 요구는 얼마든지 할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내놓고 내놓지 않는 것,그것은 국민만이 결정할 수 있다. 국민이 선거라는 길을 통해서 한다. 특정정당의 해체도 국민이 선거에서 외면하면 해체하지 말라해도 절로 해체되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학생들이 지난날의 그 많은 경험의 축적을 쌓고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학생들 주장대로 정권도 나가고 정당도 해체된다면 국민은 왜 있고 선거라는 제도는 왜 만들어 놓았는가. 학생은 국민위에 있고,국가 제도밖에 존재하는가.
왜 요사이 분신자살의 배후조종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도는지 시위학생들은 생각해봐야 한다. 민주화를 부르짖고 나서는 학생들이 가장 비민주적이고 독선·독재적이라는 동료학생들간의 비판도 반성해봐야 한다.
모든 것이 다양화·이원화되고 있는데도 줄곧 하나만 외쳐대는 그 경직된 사고,나와 주장을 같이 하지 않으면 무조건 배격하는 그 철저한 배타성과 폐쇄성,바로 그것이 그같은 소문,그 같은 비판을 몰아오고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해 봐야한다.
지금 학생들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서 가장 차갑게 사고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반국민이 뭘 요구하고 있는지,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비판하기 전에 그들의 요구를 머리로서 먼저 밝혀내야만 또다시 반대세력을 지원하는 결과를 자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가 말론 통하지않는 단절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머리를 사용하는 그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학생수가 많아질때,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높아질 때 이 단절의 기나긴 시간도 종언을 고할 것이다.<송복 연세대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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