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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노 대통령 발언 후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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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임상규 신임 국무조정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접견실로 들어서고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동해의 명칭을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고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는 게 어떠냐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은 두 갈래로 확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왜 그런 발언을 했느냐'와 '과연 그 발언이 적절했느냐'다.

노 대통령의 발언을 해명하느라 청와대는 8일 바빴다. 안보정책수석실은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대통령의 발언 요지까지 공개했다. 청와대 측의 해명은 "일본이 한.일 관계 등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동해 명칭 문제를 하나의 예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또 "공식 제의가 아닌 만큼 추가 협의나 논의가 진행된 바 없다"고 밝혔다.

◆'평화의 바다' 발언 왜, 어떻게 나왔나=정부 관계자들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새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잔뜩 꼬여 있던 한.일 관계를 풀어야겠다는 노 대통령의 강박 관념이 그런 발언을 낳은 게 아니냐고 분석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한.일 정상은 아베 총리 취임 이후 두 번째 회담을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회담 전 아베 총리와 악수하며 "손이 아주 따뜻하다""다음에 일본을 방문하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까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의 껄끄러웠던 만남에 비해 회담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북핵 문제 등 동북아 현안을 풀려면 노 대통령의 임기 말에 대일 관계 개선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논의가 회담 전에 있었다"고도 설명했다.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제안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한.일 간에 현안을 대범하게 풀어 보자는 큰 틀에서 한 발언"이라는 청와대 측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관심은 노 대통령이 외교 분야의 실무 라인과 어느 정도 사전 협의를 했는지에 쏠린다. 발언의 돌출성을 따지는 잣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회담 전 여러 현안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이런 방안에 대해 브레인 스토밍(아이디어 분출 식 자유 토론)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구체적인 협의 과정.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동해 표기 문제는 공식 의제가 아니어서 정상회담을 위한 정책 협의를 하지 않았으며, 별도의 자료를 준비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요컨대 준비된 발언도, 외교적인 제안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국내 정치에서 드러났던 노 대통령의 '돌출적 스타일'이 정상 외교 무대에서도 표출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1705년 프랑스의 대표적 지리학자 기욤드릴이 제작한 지도의 일부. 동해(MER ORIENTALE)·한국해(MER DE COREE)표기가 선명하다.

◆'발언의 적절성'놓고 비난 봇물=한나라당과 시민단체.네티즌 등은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이 보도된 직후 "대통령이 영토의 정통성 문제를 스스로 훼손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99년부터 독도.동해 명칭 지키기 운동을 벌여온 시민단체 '반크(VANK)'의 박기태 대표는 "해외 교과서 제작 업체나 인터넷 업체를 설득해 '일본해'표기를 '동해'표기로 바꿔놓으면 일본 측이 다시 일본해로 바꾸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며 "일본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스스로 '동해'표기를 포기했다는 증거로 악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해.동해를 병기(倂記)하는 등 상황이 다소 나아지고 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실린 관련 기사엔 수천 개의 댓글이 붙었다. 노 대통령의 발언에 찬성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독도를 '평화의 섬'이라고 부르자는 것과 마찬가지(ID:lanotte)"와 같은 비판.성토의 글이 훨씬 많았다. "주권의 상징인 동해 표기를 포기하겠다는 것" "애국가 가사를 바꾸겠다는 거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더욱이 "일본이 '평화의 바다'라는 이름을 받아줄 테니 독도 역시 '제3의 명칭'을 사용하자고 제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댓글 중에선 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의 '독도 폭파 발언'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었다.

외교부 산하 단체인 동해연구회 이기석(서울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회장은 "동해 명칭은 2000년 이상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려면 '동해'라는 명칭에 담긴 고유성.역사성.정체성을 고려한 국민 전체의 의견 수렴 과정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측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르는 방안을 대통령이 정상 외교에서 불쑥 언급한 건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이다. 주권의 상징인 동해 표기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박승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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