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불신 키우는 전기요금정책/한종범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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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상황이 급박해지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렁저렁 위기의 고비를 넘겨온게 우리경제가 보여준 「능력」이었다.
장기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일을 추진하는 능력은 모자라도 그래도 위기에 대처하는 순발력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 진통을 겪고 있는 전기요금 인상안이 이같은 현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력수급예측의 잘못은 분명히 인정해야 하지만 동자부가 여름철 성수기를 맞아 전력요금 인상을 결정한 것은 시기상 맥을 제대로 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일 국무회의는 전력요금 인상안을 재론키로 했던 당초 방침을 바꿔 이에 대한 심의를 이달 중순으로 연기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인상안은 지난주 심의보류에 이어 이번주 국무회의에는 아예 안건조차 상정되지 못한채 다시 이달 중순으로 미뤄졌다.
전력요금 인상은 상반기 공공요금을 올리지 않겠다고한 정부의 약속에 위배될 뿐 아니라 어려워진 전력사정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전가시키는 안이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의 전력사정은 그러한 발상이라도 빨리 도입해야할 만큼 심각하다.
최대고비인 여름철이 다가오고 요즘 불티나게 팔리는 에어컨만 봐도 뭔가 대책이 서지않고는 설마하던 제한송전이 결코 현실화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전력요금 인상이 안이한 수단이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 한다면 시기를 놓치지말고 시행되어야 한다.
명지대생의 치사사건 이후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시국때문에,악화된 국민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엉뚱하게 전력요금의 인상결정을 미적거리고 있다는 것은 책임있는 정부가 할 노릇이 아니다.
시국상황이 어렵더라도 국민에게 협조를 구할 것은 구하고 불가피한 부담을 지울 수 밖에 없으면 이를 설득하고 시행하려는 노력을 해야지,시국도 어수선한데 전력요금 인상같은 것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대처하는 정부에는 더더욱 마음놓고 나라살림을 맡길 수가 없다.
국무회의에서 고질적인 부처이기주의에 휘말려 인상안이 보류된 것이나 시국상황을 이유로 결정이 미뤄지는 과정을 보면서 현 정부의 관리능력에 의구심을 넘어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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