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힘보다 참을성'우리네 영웅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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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어령의 삼국유사 이야기

이어령 지음, 서정시학, 446쪽, 2만2000원

우리나라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원로 비평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의 삼국유사론이 집대성됐다. 그동안 수많은 저작과 강연에서 풀어낸 그의 삼국유사 이야기를 이채강 시인과 대담하는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시인은 '신화의 거울' '영원한 한국인의 정체, 그 경계 읽기' '신화에 숨겨진 생성의 비밀' '영원한 한국여인의 아름다움과 질김' '인간과 자연의 감통(感通)' 등 다섯 가지 주제에 맞춰 지은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은이가 풀어내는 삼국유사 담론의 폭과 깊이는 넓고도 깊다. 지은이는 아들(제우스)이 아버지(크로노스)를 죽이고 신의 왕좌에 오르는 희랍 신화 등 일반적으로 갈등과 투쟁, 분열로 점철된 서방 신화와 달리 단군신화는 '혼례를 통한 평화로운 권력자의 탄생'을 나타낸다고 본다.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이가 더 많은 사람이 덕이 있을 테니 왕으로 삼자"고 한 노례와 탈해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지은이는 우리의 영웅은 서양처럼 남과 싸워 이기는 호랑이형이 아니라, 마치 도를 닦는 것과 같은 고행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는 곰형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보온달이나 서동요의 막동방, 사씨남정기의 사씨부인 등 "무력을 무력으로 직접 대하지 않고도 정신력으로 이긴다는 인간형"이 우리 서사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해보다 달을 더 많이 노래한 우리 선조 이야기, '노인헌화가'로 엿본 옛 미의식 등 흥미로운 담론이 이어진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한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다가 주몽.연개소문 등 고구려의 영웅 쪽으로 대중의 관심이 옮겨갔다. 이제 더 거슬러올라가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의 원형을 돌아볼 때도 된 듯하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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