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흙 속에서 찾아낸 비옥한 깨달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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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조화로운 삶

224쪽, 9800원

이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그물망 속에서 한 개인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고 확신에 차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쳇바퀴 속 다람쥐들이 무기력하게 고개를 내젓는 동안 이 책의 주인공 피에르 라비는 70 평생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옹골찬 신념으로 살아왔다. 책은 공허한 설교가 아닌, 단단한 사상적 기반과 실천으로 이뤄진 한 농부철학자의 삶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라비는 1938년 알제리 남부 오아시스에서 '사막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인 가정에 입양됐던 그는 단순기능공으로 일하던 스물두살 나이에 아내와 함께 남부 시골마을로 귀농을 감행했다. "집단의 노력이 공평하게 나뉘지 않는 세계"와 "인간의 가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기업인들"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생산자 스스로 고되게 노동한 결실을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일. 라비에게 그것은 농사였다.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암울했다. 어느새 "도시화와 산업화의 방식이 시골에까지 침투"해 있었던 것. 그는 3년 간의 농경 끝에 독한 화학비료로 땅을 오염시키고 기계로 마구 파헤치는 '생산성 증대' 위주의 농사 방식을 영구히 추방해야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고, 우리에겐 그것을 오염시킬 권리가 없다. 동물들은 결코 잘려진 몇 킬로그램의 고깃덩어리가 아니다"라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생명존중 사상은 '생명농업'으로 이어진다. 라비는 유기물과 부식토, 퇴비 등을 이용하는 자연친화적 농법을 연구해 땅에 적용하고 성공을 거둔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아프리카 빈곤국가들을 다니며 불모지를 기름진 땅으로 바꿔놓는다. 현재 생명농법을 교육하고 강연하는 등 이 분야 국제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라비의 실천이 씨줄이라면 그의 사상은 날줄이 돼 책을 촘촘하게 메운다. 그가 사는 방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우리의 무신경함을 반성하게끔 하는 통찰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사자는 양을 잡아먹고 배를 채우지만, 나중을 위해 따로 저장해두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 약탈자들은 도가 넘칠 정도로 필요 이상의 것들을 원한다""자동차 배기가스만을 호흡하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공기가 부족하다. 정수된 물만을 마시기 때문에 물이 부족하고, 아스팔트 위만 걷기 때문에 흙이 부족하다. 가스레인지의 불꽃만 들여다보므로 불도 부족하다"등등. 더불어 지역 먹거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로컬 푸드 운동이나 사하라사막 이남 국가들의 심각한 사막화 현상, 아프리카 빈국들의 빈곤의 악순환 등 지구촌의 크고 작은 구조적 문제들이 각기 따로 노는 별개의 문제가 아님도 일깨워준다. 획일화된 삶, 성공우선주의의 메커니즘에 현기증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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