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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두살의 슬픈 명세서/김주영(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저승 삼도천 주변을 뜬귀로 떠돌던 어떤 남루한 혼백이,금수강산 장한 곳이 있다는 삼신할미 꾐에 빠져 남도땅 한 촌부를 점지해 쉰두해 전 이 땅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어미 가계가 궁핍해 산후조섭 허술했고 갓난 것 또한 젖먹이지 못했다. 어린것 태어나보니 이 땅은 핍박받고 있는 일제하에서 죽 떠먹을 놋수저조차 전쟁터로 징발당해 먹을 것이 있어도 먹을 수 없었다.
곰팡이핀 대두밥 배급으로 허기를 채우거나 산에 양토가 있으니 그 흙에다가 밀기울 버무려 개떡 만들어 먹거나 국수로 눌러 근기를 지녀왔으니 배설할 때마다 하혈이더라. 새벽이면 뒤꼍 감나무의 감꽃을 주워 허기채우고,낮이면 해금내 등천하는 옹기그릇 동이의 물로 점심을 대신했다. 저녁에야 겨우 보릿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을 먹을 수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날은 소년의 생일이었다.
○고생 많았던 어린시절
어린 나이에 해방이 되었는데 해방이 뭔지 알기도 전에 우익과 좌익의 소용돌이가 소년의 가슴에 피비린내를 심었다. 어른들의 두 다리 사이로 사형을 당해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젊은이의 참혹한 모습을 보았다. 길거리에는 부황이 난 사람들이 늙은 개처럼 어슬렁거렸고,소풍가는 날 소년은 으레 결석했다. 운동회 날엔 트랙을 반쯤 돌때까진 1등이었다가 골인지점에 이르러선 항상 꼴찌로 들어갔다.
여름이면 오직 먹기위해 작은 담수어를 뒤쫓아 개울 바닥에서 자빠지고 엎어졌으며 겨울이면 배추뿌리를 깎아 밤허기를 채웠다.
국민학교를 채 마치기도전에 6·25가 터져 피난길에 나섰다. 총소리를 피해 산협마을을 어미뒤따라 누비게되니 하루인들 정처가 없었고,국방군을 만나서도 꾸벅 절하고,인민군을 만나서도 꾸벅 절했다. 갖은 풍상 겪으니 소년은 물 많이 준 콩나물처럼 웃자라나 허우대는 아직 소년이되 심성은 벌써 육십 늙은이가 되었다.
중학이나 고등학교 시절에야 겨우 상표가 붙은 네모진 알루미늄 도시락을 가질 수 있었으며 대학 입학하고 2년도 견디지 못해 자진휴학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그 살벌했던 군대생활,음식찌꺼기를 버린 짬빵통의 것을 다시 그릇에 담아 남김없이 먹는 기합도 받았다. 제대하고나니 세상은 온통 실업자 사태,겨우 빌어 시골 직장얻어 식솔들 먹여 살리니 옛날 굶어죽은 동기간들 생각 때문에 끼니때마다 눈물 겹더라.
○살만한 세상은 어딘가.
그러나 어느 대통령이 문득 일어나 못살지말고 잘 살아보세라는 외침에 그것 참 좋구나해서 다시 허리띠 졸라매고 산비탈에 콩심어 메주쑤고,밭을 논으로 만들고,빈터에 공장지으니 밤마다 온 삭신이 녹아들듯 피곤으로 저미더라. 오전 5시에 졸며 직장나가 밤 12시에야 겨우 귀가하니 아내는 사내를 돈버는 기계로만 여겨 남편은 나날이 초췌해 갔다.
그나마 셋방살이 모면했는데,그사이 아버지와 아들 심성에 앙금져 식탁에 마주 앉기조차 꺼리게 되었더라. 언제인지 모르게 신경통 생겨 아비가 사우나 출입하니,아들은 아비를 보수반동으로 여겨 어느날 술마시던 아비는 홀로 방에 앉아 흐느껴 울더라.
과연 무엇이 살만한 세상인가. 쉰두살의 사내는 그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내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누구의 약속과 장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환경처장관이 도봉산인가 관악산계곡 어디선가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모습에서 고소를 금치 못하고,독극물을 배출했던 전자회사 공장에 국회의원들이 출동해 사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신문광고에 호소해 철저한 정비를 맹세해 조업재개가 되었건만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으니 누굴 믿으랴.
공공요금 인상하지 않겠다고 장관이 땅땅 벼르면 필경 며칠 못가 인상되고 골프장때문에 산의 창자까지 후벼파고 있으니 쉰두살의 사내에게 남은 것은 허탈 뿐이다. 그래서 사내는 이제 모주꾼이 되고 말았다. 밤 12시전에는 귀가해본 적이 없는 아들의 벗어둔 윗도리에서 진하게 풍기는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사내는 자꾸만 술을 마신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데모때마다 정권퇴진만 부르짖는 것일까.
○남은 것은 허탈과 술뿐
노조는 임금인상만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그 공장의 비밀폐수로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고발하려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쉰두살의 사내는 술을 마신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빌려 쓸뿐 내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땅에 아들과 딸 낳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손톱 밑에 가시든건 알고 등뒤에 등창난 것은 모르다니.
그것을 알고 있어야할 환경처장관이 산 계곡에서 맥주깡통이나 헤집고 있다니,그 곳에 내려가서 삼엄한 표정으로 현지조사하던 국회의원님들 얼굴 좀 자세하게 봐둘 걸,그래서 사내는 또한 술을 마신다. 맵고 독한 술을 마셔야하는 이 슬픈 사내에게 또한 독극물조차 마시게해야 속시원한 까닭이 무엇인가. 참아왔지만 환경처장관 물러나고 그 전자회사 문 닫아야만 이 갑갑한 응어리 다소나마 풀어질 것 같은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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