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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남편은 두 얼굴의 아내 원한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우당 선생의 셋째 아들이며 김우중 회장의 바로 위가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1934년 6월 9일생의 김덕중 박사다.

김 박사는 경기고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미주리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다. 앞서 언급했듯 아주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것에서 보여주듯 사실상 대우빌딩의 기둥에서는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 박사에 대해서는 아우 김우중 회장 못지않게 많이 알려져 있어 사족을 덧붙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대우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대우가 성장하는 데 있어 음으로 양으로 조언을 해왔다는 것이다.

물론 경영에 대한 간섭이나 방향을 가리키는 역할은 그의 몫이 아니었지만 경제 측면의 어떤 문제를 두고 의견을 구할 때면 늘 김 박사의 분석이 중심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형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언제나 논쟁이 붙으면 형님이고 아우고 할 것 없이 헛간의 절구통처럼 모두 굳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 형제들의 평이었다. 외모는 대단히 순하고 편하게 보이는데 고집이 나오면 타협이 없는 모양이다.

“여담이지만 형제들이 서로 바쁘니까 1년에 기껏해야 제사 때나 관중 형님 생신이거나 크리스마스에 회동하는 정도거든요? 그런 때도 형님이든 동생이든 서로 전화를 걸어 ‘덕중이가 참석한대?’ ‘덕중이 형님 오신답니까?’ 물어봐요. 그리해서 오신다고 하면 그날은 전부 슬금슬금 지각해서 모여, 허허허. 학자한테는 손익계산이라는 게 없으니까 형님이든 동생이든 실적 나쁘면 한마디씩 푹푹 찌른단 말이야. 그게 듣기 싫은 거지 전부. 허허허. ”

김덕중 박사의 러브스토리

물론 김 박사가 실전의 노장들인 형님이나 아우의 ‘현장 실력’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의 맥을 짚는 통찰력에서는 정말 뛰어나다고 김우중 회장은 회고했다.

어쨌든 외모에서부터 학자풍인 김 박사는 어릴 때부터 의지하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앞뒤를 다 잴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김우중 아우하고는 눈만 뜨면 티격태격 싸웠다. 만만한 게 젖 먹는 강아지라서 그랬을까? 싸우게 된 내용도 김 박사다운 테마다.

“야, 너 나중에 크면 뭐 될 끼가?”

느닷없이 우중을 붙잡아 놓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걸 우째 아노. 커봐야 알제.”

“그것도 모르고 커서는 뭐 할끼가. ”

“그럼 크지 말고 죽으란 말이가!”

“뭘 할 낀지 정해놓고 커야 거기에 맞춰서 크제!”

그리곤 “콩” 쥐어박았다. 툭하면 이런 식으로 덕중 형과 싸움이 시작됐다면서 김 회장은 천장이 흔들릴 정도로 홍소를 터뜨렸지만 김 박사는 어릴 때부터 벌써 뭘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그에 맞도록 성장할 수 있다고 했을 만큼 앙증스러운 이론가(?)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 박사의 됨됨이를 알게 해주는 것은 부인 박용주 여사하고 있었던 러브스토리. 김 박사는 대학을 마치고 잠시 귀국해 조그마한 미군 계통 업체에 취직해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도 그랬지만 국내에서도 결코 남한테 의지하는 일이 없었다. 주머니에 지전 한푼 없어도 손을 벌리는 일이 없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런 성격의 김 박사가 은행에 갔다가 담당 창구의 조용한 아가씨 한 명을 보았다. 눈이 약간 아래로 내려온 순진하게 생긴 미스 박이었다. 마음이 끌렸다. 그렇다고 당장 작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어렵게 밖에서 만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물량 공세를 퍼부을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돈도 없었다. 결국 손만 살금 만져봤을 뿐 입술 향도 맡아보지 못한 채 속만 태우다가 박사 코스를 밟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아쉽지만 미스 박은 국내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간 큰 여자들 같으면 배낭 하나 훌렁 메고 죽을 먹든 밥을 먹든 따라갔을지도 모르지만 미스 박은 그런 배짱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부터 미스 박은 임을 향한 일편단심을 신문에 담아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는 김덕중에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국내 신문을 보낸 것이다. 이틀이나 일주일씩 모았다가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정성이고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수천 마디 속삭인 사랑이었다.

마침내 김덕중은 박사가 돼 돌아왔다. 요즘은 워낙 학위 취득자가 많아 실어주지도 않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 신문에 어김없이 사각모를 쓴 사진과 함께 동전만 한 크기로 실렸다.

그래서 공항에 내리기도 전에 중매가 들어가고 돈푼이나 있다는 집안의 처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을 넣어 접선을 요청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김 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공항에도 나가 보지 못했던 미스 박은 소금에 절인 김장배추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김덕중 전 아주대 총장(왼쪽)과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필코리아리미티드 회장. 정 회장은 김 전 회장의 권유로 힐튼호텔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주위의 갖은 유혹과 온갖 충고에도 미스 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미스 박을 꽉 붙들고 힘차게 눕혀버렸다. 집안에서는 구들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고, 얼음판에 나자빠진 황소같이 눈만 끔뻑거렸다고 했다. 그때 부인이 된 미스 박에게 김 박사가 했던 말이 있었다.

“신(神) 외에는 아무도, 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나만 믿으시오. ”

김 박사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로서 평생을 살아온 김우중 가(家)의 선비다.

그 다음이 넷째 김우중 회장. 그에 대해서는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될지 모른다. 1936년 12월 19일생인 김 회장은 경기고를 거쳐 연세대학을 졸업한 후 사실상 바로 창업했다고 할 수 있다. 잠시 샐러리맨 생활을 했지만 그것은 창업을 위한 준비기간이었을 뿐이다.

“김 회장은 원칙밖에 모르던 사람”

대우그룹의 영욕은 이미 앞에서 선을 그었고, 기업인들에게는 사법부의 판단보다 더 무서운 자신 스스로의 평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국민은 그것을 믿고 향후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의 행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금도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느 부모를 막론하고 모든 자녀에게 들려주는 간곡한 당부고 교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누구도 공부를 잘해야 성공한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교단의 선생이 실력 배양보다는 친북 사상을 가르치고,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는 생산성보다 파업의 빌미를 찾아내는 사람이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한탕주의가 독가스처럼 덮기 시작했다. 성실보다는 기회 편승에 유능해졌으며, 성공이라는 말은 정치적 유착을 상징하는 것처럼 돼버린 지 오래됐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나마 김 회장은 최소한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를 설립, 대그룹의 총수가 됐다. 결과는 불미스럽게 됐지만 세계경영을 주도해 온 추진력은 한때 세계적인 이코노미스트들이 주목할 정도로 부러움을 산 것도 사실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거나 통째로 상속받아 총수가 된 경영자들과 비교되는 부분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라는 것이 비록 실패한 경영자가 된 셈이지만 그를 통해 생각해보게 하는 점이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가족사를 볼 때 김 회장이 중심 역할을 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우그룹을 한창 성장시키고 있을 때도 사실 그는 매정할 정도로 주변을 둘러보는 일에는 의도적이라 할 만큼 무심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둘째 형 김관중 회장도 가끔은 고개를 갸웃했었다고 했다.

“70년대 말, 그 무렵까지만 해도 원칙밖에 모르던 김 회장이었어. 내가 볼 땐 솔직히 그랬어.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디다. 무근 얘긴고 하면, 그 전엔 친인척이라 해도 특별히 봐주거나 비공식으로 눈을 감고 모른 척한다거나 배려하는 것은 절대 허용 안 했어요.

조카가 부탁을 해도 냉정하게 원칙을 설명해요. 그걸 내가 직접 봤다고.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집안 어른이라든가, 가까운 친인척이 어려운 입장에 있다는 보고를 받으면 조용히 지시하는 겁니다. 인생을 그만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변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게 연륜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긴 거라고 봤지요. 그때가 일을 막 벌이던 시기야. 그러니까 대기업이든 소기업이든 경영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 매사에 자신이 생기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는 거야. 그래서 ‘이제부터 진짜 김 회장의 원숙한 능력이 발휘되는 걸 보겠구나’ 그런 느낌이었어요. ”

정희자 여사는 활달한 여걸

물론 김 회장이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게 되리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때에 들려준 김관중 회장의 촌평이었지만 연륜과 경험으로 보면 지금도 우리 재계에서는 그만한 나이에 그만한 경륜을 갖춘 경제인이 드문 것은 사실일 것이다.

김우중 회장의 부인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힐튼호텔 회장을 지냈던 여걸 정희자 여사다. “평범한 월급쟁이 아내로 살려고 김 회장을 만났다가 원하지 않은 대그룹의 회장 부인이 돼 사생활을 도둑 맞고 있다”면서 웃으면서도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그런 사람이지만, 역으로 회장 부인이 되지 않았으면 그 활달하고 직선적인 성격에 어떤 일을 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진심을 알기란 수수께끼 같다.

사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계를 가꾸고 싶은 욕망이 커서 미 하버드대학에서 동양미술사(원래 대학에서의 전공은 건축학)를 공부했다지만 어느 순간 ‘남편은 두 얼굴의 아내를 원한다’는 자각을 하고 회장에 취임했다고 말한 것은 솔직히 평범한 월급쟁이 아내로 살기를 원했다던 것과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해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 여사가 인터뷰를 사양하다가 억지로 만난 적이 있었다. 사양하는 이유는 자신이 표면에 나선다면 그것은 남편인 김 회장의 또 다른 면을 털어내 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에 오리려 더 숨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힐튼호텔 회장에 취임하면서 취임의 변으로 남편은 두 얼굴의 아내를 원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김)회장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에게서 두 얼굴을 원합니다. 하나는 조용하고 정숙한 것이고, 또 하나는 언제라도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그런 여자이기를 바라는 것이죠. ”

지금은 건강이 아주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 여사는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대로 다소곳한 여인은 아니었다. 총리를 시켜도 해낼 것 같았고, 골프도 잘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여걸(女傑)일 성싶었다.

정 여사에 관해 몇 가지 전해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대그룹 중에서 유일하게 ‘대우 가족’이라는 가족 개념을 도입한 것이 정 여사 아이디어며, 해외 지사에 파견되는 직원들을 부부 동반으로 나가게 해준 것도 정 여사라고 했다. 대우가 국내 최초로 기혼 여성을 채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 아이디어 역시 정 여사에게서 나왔다는 귀띔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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