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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3)<제85화>나의 친구 김영주(18)|이용상|호남성서 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나는 시금 쓰고 있는「나의 친구 김영주」를 만나기 위해 가고 있다. 북지 산서성·운성을 떠나 중지 양자강 쪽을 가고 있으나 김영주가 남쪽 멀리 호남성에서 나를 기다리고(?)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
그러니 그 기나긴 여정의 중간 얘기는 극히 압축시키고 주제인「나의 친구 김영주」만나기를 서두르겠다. 그러나 오늘만은 후에 나와야 할 김영주 얘기 한가지를 미리 앞당겨 쓰겠다.
항일전신에 참가하기를 희구하는 일개 한국청년의 비밀을 죽음으로 대시했던 중국 공작원 천바이랑. 그는 나를 팔로군에 가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처형을 면하게 해준 사람이다. 그의「죽음의 의리」는 4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나에게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다.
사람의 운명은 침으로 알 수 없는 것.
눈보라 치던 그날 밤. 부대서문 망루 대에서『조선 동포들과 꼭 함께 탈출해야 한다』는 내 고집이 꺾이고 그가 이끄는 대로 우리 동포 신병들을 버려 둔 채 나 혼자 탈출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천바이랑을 따라서 인민 해방군이라는 중공군에 갔을 것이다. 그리고 천바이랑이 해방군에 가면 소개하겠다던 조선 동포들은 대부분이 중공「대장정」에 침전했던 김무정을 비롯한 조선 의용군들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8·15후 그들의 기지인 연안이나 태행 산맥을 떠나 북한으로 갔던 것이니 나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했을 것이 뻔하다. 그리니 6·25때 나는 필연코 남침대열에 끼여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의 어린 소견으로는 공산당 아니라 공산당 할아버지라도 내 조국을 빼앗은 구적 일본과 싸우는 집단이나 군대라면 나는 기꺼이 그곳에 투신했을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예정설」이든, 유대교의「운명」이든, 노자의「천명」이든 간에 나는 기어코 그곳에 끼었을 것이다.
먼저(제8화) 말했던 평양학병 궐기만 해도 그러했다. 그들은 평양사단의 여러 부대를 부수고 생존 가능한 진로라고 판단했던 평양∼양덕, 북대봉∼검산령∼장진호∼부전, 고원∼갑산∼봉두리, 그리고 길혜선(길주∼혜산)을 따라 가다가 최종목적지인 보천보에 있을 독립군에 가겠다는 것이 학병들의 포부였다. 이 진로는 당시 평양 학병대표와 길 안내를 맡은 김한복씨가 극비로 결정한 평양∼보천보 간의 최단 안건 코스였다(김한복씨는 후에 평양지법에서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즉 평양∼보천보 간의 직선이 아닌 함경도 산악을 지나는 안 완성 우회코스를 말한 것이다. 어떤 분은 투서에서『보천보에는 일본 군 경비대가 없었는데 우리 독립군이 그들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나의 상식으로 경비대란 경찰이건, 청년단이건 경비임무를 맡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경비대라는 개념 속에 두는 것이다. 투서가 지적한 바와 같이 보천보에는 당시 군이 없었다. 대신 경찰이 경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일본군 경비대」라고 하지 않고「일본 경비대」라고 표기했음을 확실히 말해 둔다.
그건 그렇고 필자는 지금 이 글의 주인공인 김영주를 만나기 위해 일본 군용열차 속에 갇힌 일등병 신세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8·15해방 후의 추석은 9월20일이었다.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후에 설명이 나오지만 내 나름대로 까닭이 있어서다. 김영주와 만난 지 얼마 후 우리는 술과 안주로 향수를 달랬다. 그간 중국인들 사이에 끼여 고독했던 나는 그의 출현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끌어안고 뒹굴었으니 말이다. 기쁨은 김영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못 먹는 술에 알딸딸해져 김영주에게 말을 걸었다.
『김 동지, 사람의 운명이란 참 묘한 거지요? 내가 지난 9월 평양사단에 입대했을 때 나보다 8개월 먼저 입대한 학병들을 만났어요. 그 선배들이 말하기를 자기들 약 1백 명이 평양사단 여러 부대를 일시에 쳐부수고 함경도 고원 밀림지대를 뚫고 보천보·혜산진·장백으로 우리 독립군을 찾아갈텐데 너도 가담하겠느냐는 겁니다.』
김영주는 술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다 말고『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기꺼이 참가하겠다고 나섰지요. 그때 궐기 날짜가 10월1일 추석날이었어요. 오늘이 추석이니 꼭 1년이 됐네 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추석 5일전에 나는 평양에서 북지로 이동됐으니 참가 못했습니다. 그때 참가했더라면 독립군이 일본 경비대를 전멸시켰다는 감격적인 보천보 구경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때 김영주는 아주 감개무량하다는 듯이『이 동지! 그 보천보 습격 때 나도 거기에 한몫 끼었었습니다.』
『뭐요?』 나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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