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유일 강대국 체제의 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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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불행히도 이는 유례없이 좋은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직 미국만이 21세기 초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세울 힘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이를 위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그랬던 것처럼 새 질서 형성이라는 목표를 가장 우선시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유일 강대국 체제라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초강대국의 지위는 항상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이 사실을 잊거나, 적절하게 행동할 능력을 상실한 경우 그 나라는 항상 쇠락하기 시작했다. 옛 소련의 붕괴는 미국에 '트로이의 목마'가 됐다. 바로 유일 강대국 체제라는 독이 든 선물이다.

미국의 정치적 자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미 대외정책의 일방주의적 행태는 장차 세계질서에 커다란 진공상태를 초래할 것이다. 중국.유럽.인도.러시아는 미국의 역할을 떠맡을 힘도, 사명감도 없다. 오직 미국만이 외교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이기심과 윤리를 융화시킬 능력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잠재적으로는 그렇다.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했던 것은 미국뿐이다. 물론 모든 곳에서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남미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원칙을 적용한 곳에서는 국제협력을 추구하는 미국의 힘과 의지가 세계를 한데 묶는 질서를 형성했다. 유엔.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국제법.국제형사법, 오늘날의 자유롭고 통합된 유럽연합(EU)까지 이 모든 것은 미 대외정책의 성과물이다.

미국이 이런 훌륭한 전통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9.11테러 때부터가 아니다. 훨씬 전인 냉전 끝 무렵부터 미국은 국제 조약.기구를 자신의 이익에 대한 장애물로 보기 시작했다. 미 외교 엘리트들은 미국을 국제법과 조약, 다자기구라는 무기를 가진 정치적 꼬마들에 의해 땅바닥에 꽁꽁 묶인 걸리버라고 인식했다. 미국 자신이 형성했던 기존 국제질서는 미국인들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공격받았다.

요즘 미국 내에서 쏟아지고 있는 이라크전 패배에 대한 비판은 뭔가 부족하다. 여전히 힘의 일방적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은 물론 이라크연구그룹(ISG)의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다자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라크에서의 현 상황이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의 패배를 웅변하고 있다.

중동과 북한, 수단의 다르푸르 등에서 미국은 혼자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의 힘이 없다면 이들 지역의 전망은 어둡다. 자원관리, 기후변화, 환경, 핵확산, 군축, 테러리즘, 유엔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일방주의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지만, 미국의 단호한 리더십이 필수적인 것도 사실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과거 미국을 '필수 국가'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 말은 그때도 옳았고, 지금도 옳다. 미국을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미국 자신이다. 미국은 1945년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외롭고 쓸쓸한 길을 고집할 것인가.

다른 어떤 강대국도 가까운 장래에 미국의 역할을 떠맡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반대말은 진공상태와 혼돈의 증가다. 따라서 미국이 다자주의로 복귀하는 것에 사활이 걸린 것은 미국의 친구들만이 아니다. 미국의 적들에게도 이는 똑같이 중요하다.

정리=김선하 기자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