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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국경제가 '돼지꿈' 꾸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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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새해는 음력으로 600년 만에 돌아오는 '황금돼지'해라고 한다. 정작 역술에는 그런 풀이가 없지만 홍색(紅色)을 재물과 연상시키는 중국발 편서풍에 실려온 기복(祈福) 신앙이 때 아닌 꽃을 피우고 있다. 근래 집단우울 증세가 깊어진 한국인의 복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물씬 묻어난다.

오늘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년째로 접어들고, 그때처럼 연말에 승패 향방이 오리무중인 대선이 걸려 있기에 더욱 불안과 조바심이 느껴지는 새해 아침이다. 나라 경제의 운행이 순탄하기를 다짐하는 새 아침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87년 민주화 운동과 93년 민간정부 출범 이후 세월이 흐를수록 과거 군사권위주의 시대에의 향수가 확산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을 국민의식의 역류로 보아 단순히 시민단체적 개혁운동으로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심, 그리고 역사는 주로 민생경제의 넉넉함과 부족함에 따라 갈지자걸음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무릇 국민의 집단적 기억력은 선택적이고 건망증이 심해 과거를 미화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더라도 과거에 대해 느끼는 향수는 현재에 대한 불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민초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어떤 차이를 감지하고 있는가. 첫째 권위주의 정부는 민심을 잡기 위해 경제개발에 힘써 절대빈곤 탈출에 성공을 거둔 반면, 민간정부는 상대적 박탈감을 확대 재생산해 대국민 정치 교화에 힘썼다.

둘째로 과거 적국과도 손잡아 청구권 자금을 도입하고 선진국의 자본.기술.시장을 확보하려고 밖으로 눈을 돌린 반면, 민간정부는 민족자주를 앞세워 전통적 우방과 충돌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셋째로 정부 내부에 조정장치가 작동돼 부처 간 이견 표출이 적었던 과거 정부에 비해 현재 정부는 정책 조정 기능이 결여돼 있어 거시적으로 조율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정통적 정부기구 위에 다수의 특수위원회가 군림해 비전문인의 입김이 거세다.

이상은 물론 현상에 대한 하나의 캐리커처에 불과하지만 이를 뒤집어 곱씹어 보면 새해 바람직한 정부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환란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엔진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실적을 보이는 것은 자원 부족이나 달러가치 하락 등과 같은 대외요인 때문이 아니라 주로 내부요인 때문이다.

기업부문은 10년 전부터 재무구조는 대폭 개선됐지만 지배구조.투명성 측면에서 구조조정에 한층 더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들이 비록 소수의 세계적 브랜드를 보유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연구개발, 부품 국산화 또는 글로벌 아웃소싱 등에 더욱 기민해야 한다.

환란 이후 개선은커녕 개악의 조짐이 있는 부분은 노동시장이다. 군사정부 시절 억압의 반작용이 지나치게 장기화되고 있고 노조가 정치이념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현 정부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움켜쥐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성공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저질러 온 많은 과오를 덮을 수 있는 역전의 카드다. 이 카드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말 많고 그 말마저 자주 바꿔온 이 정부지만 그래도 가상한 말 한마디는 "인위적 경기부양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말 대선을 앞두고 선심성 사업들이 즐비할 것이고 재정 조기집행이 발동될 것이다. 상반기 성장 둔화가 하반기보다 두드러질 전망이기에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른바 '정치적 경기 순환'을 초래해 차기 정부의 경제운용에 차질을 줄 수 있다.

새해는 세계적인 경기후퇴 속에 원유가격 급등, 달러 약세 지속이 점쳐진다. 그러나 크고 작은 위기가 없던 시절이 있었던가. 환란도 극복한 우리 국민이다. 온 국민이 돼지꿈 꾸는 데 합심한다면 못 할 일이 있겠는가.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