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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위원장|시대 따라 굴절 많았던 노동 운동 "총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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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6·25」이후 노동계에 개혁의 바람이 몰아쳤던 88년 11월, 제7대 한국노총 위원장 재임도중 국회로 진출한 김동인(민자·전국구) 위원장 후임을 선출키 위한 노총 대의원 대회가 소집됐다. 대회장인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총 위원장 직무대리 이시우 후보와 섬유노련 위원장 박종근 후보가 예측 불허의 팽팽한 득표 전을 벌여 왔기 때문에 개표 결과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이 후보는 80년 이후 전국 자동차 노련 위원장·노총부 위원장 등을 엮임하며 다져 온 조직기반과 위원장 직무대리 경험을 부각시키며 한 표를 호소했다.
박 후보는 5공 시절인 80년 말 노동계인사 숙 정 때 섬유노련 위원장직을 떠났다 87년 복권, 위원장 자리를 재탈환한 인물로「개혁 노총」의 기치를 내걸고 득표 전을 벌여 왔다.
조직력과 선명성, 보수와 진보의 대결 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조직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노총의 생리로 봐서 조직기반이 약한 후보가 이 후보를 누르기는 어렵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예상을 뒤엎었다. 박 후보가 14표 차로 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박 후보는 90년 2월 실시된 선거에서도 재도전한 이 후보를 20차로 따돌리고 재선됐다.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몰아친 개혁의 목소리가 노조의 한 특성인 조직력을 압도한 것이다.
박 위원장은 취임 초기부터「근로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개혁 노총으로의 변신」을 외치며 노조의 정치활동 참여를 구체화는 등 변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좌익에 맞서 결성>
그러나 전국언론노련·병원노련 등 전국 노동 조합 협의회(전노협) 소속 민주노조들은 현 노총을「제도권속의 어용 단체」라고 비난하면서 노총가입을 거부,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이같은 어용시비는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의 측면이 강하다. 해방 후 40여 년간 권력의 시녀 노릇을 대행해 온 역대 노총위원장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반발이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의 전신은 해방 이듬해인 46년3월 결성된 대한 독립 촉성 전국노동 총 연맹.
당시 우익단체인 대한독립 촉성 전국청년 총 연맹(총재 이승만) 위원장 전진한·청년부 차장 홍윤옥 등 이 여운형·박헌영 등 좌익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조선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에 맞서기 위해 대한 노총을 결성한 것이다.
초대 위원장은 홍윤옥 이었으나 곧 전진한 이 자리를 이었다.
전씨는 46년 10월 위원장에 올라 5년 동안 자리를 지킨 데 이어 52년 재선, 역대위원장 중 최 장수 기록을 남겼다.
전씨는 재임기간 중인 46년 8월 노총 위원장을 겸임한 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회부 장관으로 기용된다.
전씨의 노총위원장 겸임은 노총 내부의 심한 반발을 야기 시켰고, 전씨는 49년 3월 실시된 대의원 대회에서 유기태와 경합,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전씨 지지파는『대의원 중 무자격자가 많다』는 이유로 다음달인 4월 독자적인 대의원 대회를 열어 전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3월 파」와「4월 파」의 대립·분열은 이후 고질적으로 계속 되어 온 노총 내 파벌싸움의 시발이 됐다.
이 대통령은 양파간의 대립과 분열이 심각해지자 집단지도체제인 최고위원제 도입을 종용, 사태를 수습했다.
양파에서 2명씩 4명의 최고위원이 노총을 이끌던 최고 위원 제는 52년5월부터 6개월간 계속돼 오다 이대통령의 지시로 폐지되고 전씨가 다시 위원장에 뽑혔다.
전씨는 이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노총을 장악, 최 장수를 누렸으나 이 대통령의 독재가 노골화되자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묵시적으로 동조했고, 이 대통령의 심복인 강일매 사장이 운영하는 조선방직에서 노동 쟁의가 났을 때는 강 사장 축출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전씨는 결국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제거되고, 최고위원제가 다시 부활된다.
대한 노총의 지도체제가 1인체제로 되돌아온 것은 노동조합법 제정 후인 58년이며 김기옥씨가 위원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노총 위원장은 집권당의 예속단체 장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60년 대통령 선거 때는「이승만·이기붕 당선을 위한 선거추진 위」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7·15부정 선거에 공공연히 가담하기까지 했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다.
60년 4·19는 노동계에도 민주화의 태풍을 몰아왔다.
김기옥 위원장 등 대한 노총 간부가 총 퇴진하고 한국 노총이 출범했다.
위원장은 김말룡. 자유당 말기 대구지구 노조 연맹 위원장이었던 김씨는 대한 노총의 어용 화에 반발, 광산 노조 연맹위원장 김관호씨 등과 함께 노총을 탈퇴한 뒤 전국 노조 협의회를 결성해 노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
그러나 김씨의 민주화 의지는 5·16으로 무산되고 노동조합은 해체되고 만다.
현 한국노총이 정식 출범한 것은 61년8월. 위원장에 혁명정부가 만든 한국 노동 단체 재건 조직위 의장 이규철(전 철도노조 연맹위원장)이 무투표 당선됐다.
당시 대의원대회가 채택한 결의문의 일 절에는「5·16혁명을 전폭 지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후 노총을 이끌어 온 위원장은 이춘희·이찬혁·최룡수·배상호·정동호·김영태씨 등.
이들 중 전임 이찬혁 위원장과 대결, 4대 위원장에 당선된 최용수씨는 당선 소감에서『나의 소원은 대통령보다 노총위원장이 되는 것이었다』고 밝혔으나 재임 1년5개월 만인 7l년5월 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지명되자 노총을 버리고 정계로 진출했다.

<권력 지향형 많아>
철도 노조연맹 위원장 출신인 이씨 또한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70년 공화당 영등포 지구당위원장직을 맡고 정계에 입문, 11,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총 위원장에 대한 어용성 시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위원장 출신들의 정치·권력지향의 속성 때문이다.
70년 11월 서울 평화시장 봉제 공장 재단사 전태일 분신자살로 시작된 노동운동은 원풍모방·YH무역·컨트롤 데이타 근로자 파업 등으로 이어졌다. 고도 성장의 그늘에서 저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려 온 근로자들은「생존권확보」를 외치며 농성·시위·파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부 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상급단체 간부들은 정부의 노동운동 억제 정책에 묵시적으로 동조,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자신들의 활동비를 기업의 찬조금(?)에 의존하며 정계·관계진출을 꿈꾸곤 했다. 70년대에 유행했던「노동 귀족」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동호(7대), 김영태(8대)씨는 YH사건 이후 노사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3공 말기에 위원장을 지냈다.
정동호씨는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이 극에 달했던 상황 속에서도 조직확대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사례를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발표,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김영태씨는 위원장 취임 1년2개월 만인 89년 10월 사퇴, 정한주씨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정부서 선거 관여>
도중하차 이유는 재임기간 중 발생한 동일방직 노사분규 때「비 노동자적인 처신」을 했다는 이유로 산별 연맹 간부들이 심한 반발을 보이는 가운데 의정부 모 여관에서 당시로서는 거액인 1천5백 만원을 도난 당한 사실이 드러나 이 돈의 출처를 둘러싸고 거센 비난이 일었기 때문.
79년의「10·26」「12·12」사태이후 노동계에는「5·16」에 이어 다시 한번 숙 정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정한주씨는 이 숙 정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아 위원장 자리에 오른 부두노조 출신.
재임 도중 노동부 장관으로 발탁돼 김규벽씨에게 권한 대행을 위임하고 관계로 진출해 전진한씨에 이어 두 번째로 노동운동가가 노동행정 책임자로 전신하는 기록을 남겼다.
대한 노총이 결성된 46년 이후 5공 말기에 이르기까지 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드러난 공통적인 특징은 안기부 등 정부기관이 득표공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노총 위원장의「권력의 시녀 화」를 부채질했다.
김동인씨는 84년부터 2회에 걸쳐 위원장직을 연임한 항운 노조위원장 출신.
김씨는 재임기간 중인 86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4·3호헌 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민주노조」일각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김씨 또한 임기도중 민정당 전국구 의원이 되어 노총을 떠났다.
노총 위원장이 권력의 그늘에서 숨쉴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노총의 궁색한 살림살이.
노총의 재정은 산하 산별 연맹이 내는 의무 금으로 충당된다. 70년대 초 각 산별 연맹이 노총에 납부했던 의무금은 조합원 1인당 4원. 현재는 1백원으로 올랐다. 기본적으로 의무금액이 낮은데다 고질적인 파벌투쟁에 따른 의무 금 납부 거부 사태, 단위 노조의 재정 결핍 등으로 매월 월 평균 의무 금 납부 율은 60%선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5정 초기 최용수 위원장(4대) 은 4백여 만원의 빚을 지고 2개월 동안 가 예산을 집행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동인 위원장은 85년 8월 노총 재정난을 이유로 노총사무국내의 이성균 사무차장·김금수 정책 연구실장·박홍섭 조직부장 등 개혁파 간부 5명을 전격해고,『사용주의 부당 해고 행위를 막아야 하는 노총이 부당 해고 행위를 실천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분규 때 개입 못해>
80년 국보위조치로 개 정된 노동조합법 중「제3자 개입금지」, 행정부의「노동조합 해산 선명 명령권」및「규약개정·임원 개령권」등 독소조항도 노총위원장이 제구실을 못하도록 발을 묶었던 족쇄였다.
그래서 노총 위원장은 단위노조에서 분규가 발생해도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에 묶여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노총이 존재한다는 것을 외부에 알려주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자리를 지켜야 했다.
때문에 노동 전문가들은 90년대 노총 위원장이 짊어진 가장 무거운 책무는 노총의 대외적 자주성, 대내적 독립성을 확립시키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또 노동조합의 이념과 방향을 점검하고 그에 걸맞은 정칙을 수립하는 일도 당면과제다.
재정상의 자립 및 제2노총 창립을 준비하는「서노협」등과의 관계 정립도 급선무다.
박종근 위원장은 이를 의식, 88년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재야 각급 노동 조합은 노총의 깃발아래 하나로 뭉쳐 권력과 자본을 상대로 공동투쟁하자』고 호소했다.
또「노조의 정치참여」를 구호로 내걸고 지난 기초의회 선거 때 이를 현실화시켰다.
그러나 서노협 등 이른바「민주노조」세력들은 박 위원장의 개혁의지를 불신하고 있다. 때문에 박 위원장이 가야 할 길은 첩첩산중이다. <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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