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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영화가 한국에 안통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1번째 007 영화 ‘카지노 로얄’이 실망스런 국내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카지노 로얄’은 지난 크리스마스 주말 동안 전국관객 25만8192명을 동원, 흥행 4위에 그쳤다. 이로써 한국은 새 007 영화가 개봉 첫 주 흥행 1, 2위권에 들지 못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카지노 로얄’은 국내개봉 전, 이미 전세계 32개국에서 첫 주 1위에 오른 바 있다.

사실 ‘카지노 로얄’의 부진은 근래 007 영화 국내 흥행을 지켜본 이들에겐 놀랄 일도 아니다. 전세계적 블록버스터 007 시리즈는 유독 한국에서만은 맥을 못 춘다. 지난 10여 년 간 등장한 007 시리즈의 흥행성적을 살펴보자.

피어스 브로스넌을 제임스 본드로 첫 등장시킨 1995년작 ‘골든아이’는 전국관객 21만 명을 동원했다. 이어 2년 뒤 등장한 ‘네버 다이’가 같은 이름의 유산균 발효유까지 탄생시켰음에도 47만 명을 끌어 모으는 데 그쳤다.

세기말에 등장한 ‘언리미티드’는 다시 이에 못 미치는 37만5000명을 동원했다. 한반도 상황 왜곡으로 도마에 오른 2002년작 ‘어나더 데이’가 의외로 전국관객 50만 명을 돌파한 최초의 브로스넌 본드가 되었다. 그나마 그 정도 화제성마저 없었더라면 결과는 더 참담할 뻔했다.

생각해보면, ‘카지노 로얄’의 첫 주 4위도 6대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의 내한 등 ‘할 수 있는 홍보는 다 한 상태’에서 얻은 결과다. 영화 퀄리티도 시리즈 중 최상급이라는 평가였다. 007 시리즈의 한국시장 돌파 불가론을 결정지어주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007 시리즈는 한국에서 ‘안 먹히는’ 할리우드 아이템인가. ‘오스틴 파워’ 시리즈나 애덤 샌들러 영화들처럼 영어권 전용의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1960~80년대 중반까지, 007 시리즈는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였다. 77년부터 집계되어 있는 영화진흥공사 외화흥행 순위만 보아도 잘 드러난다.

007 10탄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78년 외화흥행 1위를 기록했다. 11탄 ‘문레이커’도 81년 흥행 1위를 달렸고, 84년의 13탄 ‘옥토퍼시’가 4위, 번외편인 ‘네버세이 네버어게인’마저도 83년 외화흥행 2위를 기록했다. 007 시리즈는 한국인이 ‘믿고 안심하는’ 프랜차이즈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근래의 007 시리즈 부진 이유는 대체 무얼까. 무엇이 숀 코너리-로저 무어 시대와 피어스 브로스넌-대니얼 크레이그 시대를 갈라놓은 걸까.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요인은 팬층의 단절이다. 007 시리즈처럼 긴 생명력의 프랜차이즈는 팬층의 연속성과 대물림이 근간이다. 이것이 흔들렸던 때가 89~95년 사이의 6년 기간이었다. 당시 007 시리즈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티모시 달턴을 2번째로 기용한 ‘살인면허’는 시리즈 사상 최악의 흥행을 기록했다. MGM UA에서 타사로 프랜차이즈를 옮겨 새 본드 시리즈가 나온다는 설도 돌았다.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다, 겨우 피어스 브로스넌을 캐스팅하고 차기 007 영화가 등장한 것.

6년간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17번째 007 ‘골든아이’는 서구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그 공로는 매체다양화에 돌아갔다.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007 시리즈는 주요 메뉴 중 하나였다. 하루에도 몇 편의 007 영화가 브라운관에서 비춰졌다.

반면, 한국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케이블 영화채널이 자리 잡았다. 팬층을 이어낼 매체가 중간에 비어버린 것이다. 비디오시장에서도 007 시리즈는 구프로 취급을 받고 진열대에서 밀려났다. 한국은 당시나 지금이나 극장개봉 후 6개월 이내의 비디오들만이 대접받는 환경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경우 이 ‘단절’이 6년이 아닌 10년이었다는 점이다. 007 시리즈는 15탄 ‘리빙 데이라이트’(87)부터 직배 시스템으로 국내 개봉됐다. 당시 중심가 유수 극장들의 ‘결의’로 인해 직배영화들은 변두리 상영관으로 밀려나 있었다. 극장의 인지도가 곧 영화의 인지도로 이어지던 시절, 변두리 개봉작은 관객동원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오랜 동안 사랑받던 로저 무어에서 티모시 달턴으로 본드 캐스팅이 바뀌어 위험부담이 큰 시점이었다.

알지 못하는 본드, 변두리 상영관, 007 영화답지 않은 초라한 면모. ‘리빙 데이라이트’는 조용히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췄고, 이어진 ‘살인면허’는 더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런 식으로 85년 ‘뷰투어킬’에서 95년 ‘골든아이’까지 어처구니없이 발생한 10년의 공백은 한 영화세대를 건너 뛰어버렸다. 신세대에게 007 시리즈는 이름은 들어봤을지언정 추억은 없는 프랜차이즈였다. 그만큼 신뢰도와 충성도도 없었다. ‘골든아이’의 ‘필연적인’ 실패는 이어진 연속 실패를 낳았다. 그것이 프랜차이즈 최신편 ‘카지노 로얄’의 첫 주 4위로 이어진 셈이다.

한편, 사회문화 환경과 영화 취향의 변화도 생각해볼 수 있다. 007 시리즈는 흔히 ‘관광지 영화’로 불리운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세계 각국 휴양지를 누비며 펼쳐지는 눈요기가 주된 셀링 포인트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007 시리즈가 가장 인기를 끌던 때는 아직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여의치 않던 시절이었다. 한국인의 해외여행 역사는 길지 않다. 기껏해야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3단계 해외여행 자유화 방안 이후부터다. 그 전까지 해외여행이란 고위층, 부유층이나 누리는 ‘도락’으로 여겨졌다. 자연히 스크린에서나마 해외 관광명소들을 지켜보고픈 욕구가 강했다.

이를 증명하듯, 88년 이전의 외화 흥행 순위에는 ‘관광지 영화’ 성격의 영화들이 많다. ‘테스’, ‘미션’,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 빼어난 자연풍광을 선보인 영화들이 그것이다. 007 시리즈의 영향을 크게 받은 모험활극 ‘인디애너 존스’ 시리즈도 ‘관광지 영화’ 성격이 짙다. 그러던 것이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부터 크게 달라졌다. 가고픈 해외 명소는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굳이 스크린을 통해 드라마 속 풍광을 훔쳐 볼 이유가 없어진 것. 이후의 영화시장은 장르 중심 시장으로 재편되었다. 인기 장르가 트렌드를 타고 계속 교체되는 식이다. 근래에는 ‘반지의 제왕’ 유의 팬터지 장르와 ‘매트릭스’ 유의 SF 장르가 외화의 대세다. ‘관광지 영화’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왕년의 인기 아이템’이 되었고, 007 시리즈도 그만큼 흥행 효력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여러 부수 요인들이 많다. 근래 국내 관객취향은 리얼리즘과 팬터지가 명확히 나뉘는 것을 선호한다. 이에 반해 기존 007 영화는 현실 스파이극에 SF적 요소가 섞여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는 분석이다. 주연배우가 계속 교체되는 007 시리즈 특유의 성격이 약점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한국 영화시장은 프랜차이즈의 인기가 출연 배우의 인지도와 맞물리는 스타 중심 시장으로 변모해 있다. 남성용 액션 블록버스터 시장 자체가 감소 추세라는 분석도 나돈다.

그나마 007 시리즈의 국내 부활 가능성은 ‘카지노 로얄’이 정통 스파이극의 형태로 옮겨갔다는 정도다. 한국인이 현재 즐기는 취향은 맞다. ‘카지노 로얄’을 기점으로 한편 한편씩 처음부터 새롭게 신뢰도를 쌓아가는 방법 외엔 없다. 그 전까진, 본드가 보드카 마티니를 젓든 흔들어 섞든, 한국인은 별반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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