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권력자를 신성시하는 신화에나 나오는 얘기다. '추대'라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 뒤에는 피땀을 흘리는 준비 과정이 감춰져 있다. 권력 승계의 모범으로 여겨져 온 중국 요(堯)와 순(舜)의 '선양(禪讓)'도 승자를 미화한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섭(攝)황제' '가(假)황제' '진(眞)황제'라는 희한한 이름을 거쳐 전한 시대를 끝낸 왕망(王莽)의 선양은 모양새만 그럴듯했을 뿐 치밀하게 준비한 찬탈이었다. 하물며 요즘 세상에 권력이 공짜로 굴러들기를 바란다면 순진한 몽상가다. 얼마 전 타계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스스로 쟁취하지 않은 권력의 전형이다. 신군부를 바라만 보다 잠시 대통령 자리를 맡아둔 데 만족해야 했다. 쿠데타 세력의 추대를 기대한 윤보선 전 대통령도 비슷하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며칠 전 재경 공주향우회에서 "충청도는 나라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왔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출마를 결심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는 "(정치에) 생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렇지만 정치권에서는 그의 정치 참여가 어느덧 기정사실이 돼 가고 있다. 그 스스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며 한 발을 들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건 조건을 따지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기존의 대선 예비후보들이 장악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에 사전 보장도 없이 들어갔다가는 망신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증도 거치지 않은 사람을 실증적 근거도 없이 추대하기 위해 다른 후보들이 물러설 수 있을까. 경선 없는 추대가 흥행에 도움이 될지, 자기 것을 하나도 걸지 않는 도박이 가능할지도 궁금하다. 역시 권력은 스스로 준비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