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을지로 금고가|교묘해지는 범죄수법과 씨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을지로4가 금고거리는 매일「범죄와의 전쟁」을 치른다.
날로 강력해지는 산소용접기의 불꽃과 거대한 「빠루」에 맞설 수 있는 튼튼한 금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이 거리가 안고있는 숙명이다.
을지로4가 지하철역 네거리 주변엔 14곳의 크고 작은 금고 판매점이 들어서 있다.
경기도일대 또는 부산에 제작공장을 갖고 있는 이곳 대부분 상점들에서 팔리는 금고는 서울 전체 판매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일제 때부터 가구점이 많았던 을지로의 지역여건 때문에 해방직후 신당동에 있던 「금명복금고상회」(현 신성금고)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금고거리의 효시.
김씨(85년 타계)는 일제시대 국내최대의 철공소였던 「미나도 철공소」의 공장장으로 있다가 193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금고전문점을 차렸다.
60년대부터는 선일·동방금고 등 다른 금고점들도 이 거리에 들어서 현재 모두 14곳으로 늘어났다.
『과거에는 돈 좀 있는 사람에겐 금고가 필수품목 1호였죠.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현금대신 수표, 절도범대신 강도들이 느는 사회 추세 때문인지 경기가 예전만큼은 못한 편입니다.』
신성금고의 대표로 7O년대 TV드라마 「여로」의 「김달중」을 맡아 더 유명한 김무영씨(54)의 말.
김씨는 7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탤런트생활을 그만둔 뒤 85년부터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신성금고를 운영하고 있다.
엄청난 금고무게 때문에 판매보다 운반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더 큰 과제.
시멘트 바닥이 꺼지거나 홈이 파이지 않도록 상점바닥에 널따란 철판을 깔아놓는 것이 기본이다.
금고를 차에 싣고 목적지까지 가서 구매자가 원하는 위치에 설치하는 것은 「도비꾼」이라 불리는 운반전문가들의 몫.
모두 14명의 도비꾼이 이 거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쇠파이프·밧줄·나무판자를 운반장비로 갖추고 손님을 기다린다.
『금고무게·건물의 층수·엘리베이터의 유무에 따라 운반수수료가 달라지죠.』
30년째 운반 일을 하고 있다는 박일서씨(52)는 아무리 힘 좋은 사람이라도 지렛대의 원리 등 요령을 모르면 1m 옮기기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높이 1m짜리는 2백50㎏, 2m짜리는 8백㎏ 정도 나가며 1백㎏ 단위로 인부 1명씩이 배치된다.
『공업진흥청의 기준상 금고는 4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손상이 없고 1천10도씨에서 2시간 이상 있어도 내용물에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동방금고 최낙원씨(38)는 이를 위해 두께 3m 이상의 철판 2개 사이에 단열재료를 넣어 금고 벽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금고털이 사건이 날 때마다 현장에가 우선 자기상점의 금고인가를 확인하고 범인들이 쓴 수법을 자세히 메모, 금고제작팀에게 알려주다 보니 자연히 기술개발이 이뤄진다』고 했다.
청진기를 이용해 금고를 터는 영화 속의 장면은 허구일 뿐, 다이얼의 구조상 소리나 감각으로는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최씨의 귀띔.
그러나 선일금고의 경우는 일반인들의 그릇된 지식 때문에 다이얼식을 아예 전자계산기와 비슷한 버튼 식으로 바꿔 금고를 만들고 있다.
금고상회의 아프터서비스는 금고번호를 잊어버린 구매자들의 금고를 열어주는 일. 이 같은 요청을 하는 구매자들 중에는 금고 번호를 적은 쪽지를 너무 귀중히 여겨 금고 안에 넣고 문을 닫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나 금고상회라도 한번 판매한 금고의 번호는 모두 없애버리기 때문에 공장의 사고처리반원들이 직접 가서 특수 비법(?)으로 문을 열어준다.
『한번은 국내 최대재벌 총수의 금고에 이상이 있다고 해 고생 끝에 열어보니 그 큰 특수 금고 안에 골프채 한 세트만 들어 있었다』고 모 금고의 김모씨는 전한다.
김씨는 그렇게 비싼 금고 안에 그 정도의 물건을 보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억원대의 금품을 값싼 무허가 금고에 넣어뒀다가 털리는 경우도 있어 금고의 용도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 이 거리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김씨는 『요즘 들어 골동품·그림 투기하는 사람들이 대형 금고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며 『이러다가는 땅 투기하는 사람까지 찾아와 땅을 집어넣을 수 있는 금고까지 만들어 달라는 것 아니냐』고 웃는다.

<국내최대금고>
신성금고에서 제작한 SM1703으로 현재 한국은행본점을 비롯한 30곳의 금융기관에 설치돼 있다.
부식방지를 위해 모두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졌고 문 두께는 90cm며 직경 95cm의 빗장쇠가 20개나 된다.
다이얼은 문 속에 내장돼 있어 다이얼 투시경을 이용해야 하며 우연히 맞출 확률은 10억분의 1이다.
적외선감지기가 있어 사람이 문틈에 끼는 것을 방지하고 내부에 비상벨과 환기구, 음식물투입구까지 설치돼 갇히더라도 문제없다.
최근에는 벽체 전체까지 철판을 넣어 제작하며 가격은 4천만원선. <이효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