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공동방위구상 구체화(해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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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걸프전에 무력감… 필요성 인식/나토와의 관계설정에 큰 이견/6월 EC 정상회담때 윤곽 드러날듯
유럽공동방위 구상이 구체화하고 있다.
EC(유럽공동체) 통합의 최종목표 가운데 하나로 EC회원국 사이에 공동방위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로 EC의 정치동맹문제가 처음 제기되면서 부터다.
그러나 우선순위에서 다른 현안들에 밀려 그동안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온 공동방위구상이 최근들어 회원국들의 갑작스런 관심을 모으면서 논의가 구체화하고 있다.
걸프전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걸프전은 미국에 대한 유럽의 상대적 무력함을 일깨워주면서 유럽국들이 군사적 측면에서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지적이다.
비록 걸프전이 유럽의 안보와 직결되는 전쟁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공동의 위기 앞에서 한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자성은 EC회원국들이 공동방위문제에 갑작스런 관심을 쏟게 하는 충분한 배경이 되고 있다.
지난달 26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렸던 EC 외무장관회담이 거의 전적으로 이 문제에 논의를 국한시킨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유럽의 공동방위구상과 관련,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앞으로 형성될 유럽의 독자방위기구와 기존의 북대서양방위기구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간의 관계설정에 관한 문제다. 나토와의 문제는 결국 미국과의 문제라는 점에서 양기구간의 관계설정은 미묘하고 복잡한 양상을 띨 수 밖에 없다.
특히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에 따라 나토 자체의 지위·역할이 재검토되고 있는만큼 이는 더욱 풀기 힘든 문제가 되고 있다. EC회원국 사이에 발견되는 공동방위구상에 관한 이견은 바로 나토와의 문제에 관한 이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EC 외무장관회담에 앞서 프랑스·독일은 나토내에서 유럽국들로만 구성되는 방위기구 설립을 주장하면서 유럽의 독자적 방위기구로 기존의 WEU(서유럽동맹)를 활용하는 방안을 공동제안했다.
형식상 현재 서유럽의 유일한 군사기구인 WEU의 공동방위기구화 문제는 이미 지난해말 로마 EC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바 있지만 공동방위구상이 구체화하는 단계에서 EC통합의 양대 견인차인 독·불 두 나라에 의해 다시 제기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독·불 양국의 이 제안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나토라는 큰 테두리를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유럽방위정책을 독자적으로 끌고 나간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두 나라는 WEU를 종국적으로 EC공동의 방위기구로 통합한다고 제안에서 밝힘으로써 EC정상들이 WEU를 통해 사실상 EC의 공동방위정책을 결정토록 한다는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재 나토체제하에서 유지되고 있는 유럽방위의 대미 종속을 대등한 수평관계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걸프전과 같은 역외문제에까지 EC차원에서 공동의 군사정책을 수행,걸프전에서와 같은 유럽의 무력감을 되풀이해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이 두 나라의 주장이다.
독·불 양국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이탈리아·스페인·벨기에·그리스·룩셈부르크 등 EC내 많은 나라가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럽방위의 핵심은 변함없는 미국의 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국의 힘을 유럽에서 약화시키거나 더욱이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경우 미·유럽관계에 적지않은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양국의 반대이유다.
하지만 영국은 걸프전 경험을 바탕으로 역외에서의 공동군사정책 수행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표명,독·불과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즉 대내적으로는 나토,대외적으로는 EC의 독자군사기구를 내세우는게 영국의 입장이다.
영국의 허드 외무장관은 제2의 걸프사태에 대비,EC공동의 신속배치군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같은 영국의 입장에는 덴마크·포르투갈 등이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가 독·불 안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EC내 패권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특히 프랑스의 독주에 계속적인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EC의 독자적인 방위기구가 나토의 틀에서 자유로워질 경우 프랑스등 EC내 강대국에 의해 유럽공동의 안보가 좌지우지되는 사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네덜란드의 우려다.
걸프전을 계기로 유럽 공동방위정책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동감하면서도 구체적 방법론에서는 이같은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EC의 정치동맹을 위한 정부간 회의가 좀더 진전되는 오는 6월말 EC 정례정상회담이 열리는 시점쯤이면 공동방위구상의 구체적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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