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왜 외자유치만 열올리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지난달 말 청와대에서 있었던 외국인투자 유치 관련 회의에서 내 개인의 회사사정을 보고할 기회가 있었다. 어려운 경제여건에 해외투자유치 확대를 위해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자리에서 국내 경영환경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해외로 회사의 생산부문 대부분을 이전키로 했다고 밝혔으나 한편으로는 마치 나라를 배신하는 듯한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국내 제조업 공동화 현상에 대해선 이미 경제계와 언론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해 왔고 그것이 현실화되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제조업이 국내 전체 산업발전에 초석 역할을 해왔으며 고용에 절대적 기여를 해왔다는 면에서 정말 큰 걱정이다. 제조업의 성쇄야말로 경기의 호.불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염려되는 것이다.

미국이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정보통신.금융산업에 집중해 어려움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으나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제조업 부문의 경쟁력약화로 실업증가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부시 정권이 강한 달러 정책을 약한 달러 정책으로 전환,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 중인 사실과 일본이 해외로 나간 기업들을 국내로 다시 불러들이려는 노력을 살펴보면 국가경제에서 새삼 제조업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다.

경제관료 한 사람이 지난번 국정감사장에서 "경쟁력 없는 제조업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경쟁력을 잃은 부분이라고 쉽게 포기하면 경쟁력을 잃게 되는 분야만 늘게 될 뿐이다. 실제 국내 기업이 중국에 처음 진출할 때는 단순 가공업체들이 주종을 이뤘으나 지금은 최첨단 업종까지 중국으로 나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회사도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공장을 세우고 있으나 열심히 일한 결과가 해외에 공장을 하나 늘리는 것으로 나타난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 국내 기업환경이 개선되면 내 나라에서 사업을 하고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성급한 체념과 섣부른 진단으로 기업의 해외유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하거나 악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불가피하게 해외진출을 선택한 기업들의 애로를 수렴해 제조업 공동화 방지를 위한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 동북아 경제 중심이나 국가 균형 발전은 결국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국내에서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와 그 이익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외자유치는 참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오로지 국내 시장만을 탐내는 외자유치는 시급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 토론회에 동석했던 모 외자 기업은 지방에 할인점을 지으려다 공무원의 비협조로 매장을 내는 것을 포기하고 50억원을 중국에 투자했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작컨대 그 지방관청에선 대형 할인점이 들어올 경우 지역 영세상인들의 생계가 크게 위협받고 지역의 자금이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일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 기업은 지방정부의 무성의를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진출로 지역민과 지역경제가 볼 피해를 일부라도 보전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제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방적으로 지방정부만 탓하는 그 외자 기업의 자세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외환위기로 큰 고통을 겪은 뒤 우리는 외국자본이라면 무조건 환영해 왔으나 이제는 옥석을 가릴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외국기업 유치를 위한 노력에 우선해 국내 기업의 어려움 해결을 위해 힘써야 한다. 외자 기업에 주는 혜택을 국내 기업에 적용해주면 굳이 해외로 가지 않을 기업도 많이 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면 갈 곳이 없어 부동산에 몰리는 4백조원의 부동자금 중 상당 부분이 기업으로 유입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기업이 사업하기 좋은 환경이 되면 외자유치도 저절로 증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급하고도 절실한 일은 국내자본이 해외로 나가지 않게 지키는 노력이다. 깨진 독을 수리하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물을 담아도 계속 샐 것이기 때문이다.

정국교 한국 EMS 산업 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