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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오래된 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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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임상수 감독을 비판하는 이들은 그의 차가운 냉소주의를 싫어한다. 자극적 소재주의라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다. 하긴 논란을 불사하는 소재를 택하는 것은 분명하다. 젊은 여성들의 분방한 성 풍속도를 그린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 식사'에서부터 중산층 가정이 집단으로 바람나는 '바람난 가족', 10.26 하루를 극세밀화로 재현한 '그때 그 사람들'이 다 그랬다. 하나같이 성과 정치라는 민감한 소재였다. 반면 임상수식 냉소주의야말로 우리 사회 환부에 대한 가장 솔직한 지식인적 응답이라는 평도 맞섰다.

그의 새 영화 '오래된 정원'이 곧 선보인다. 이번에는 1980년대다. 70년대 군부독재의 말로('그때 그 사람들'), 90년대 욕망과 가족 해체('바람난 가족')의 중간 지점이다. 운동권 학생 현우가 수배 중 미술교사 윤희와 슬픈 사랑에 빠지는 얘기다.

그 자신이 386인 임 감독은 이번에도 냉소적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황석영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지만 "(원작 속) 고귀한 이들의 고상한 사랑을 땅바닥에 발 붙이게 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윤희의 비중이 원작보다 커졌고, 아예 중심 인물이 됐다. 광주에 대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정치적 분노 때문이 아니라 "지루한 시골 생활에 뭔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현우를 숨겨주는 여자다. 운동보다 사랑이 중요한 윤희의 눈을 빌려 영화는 80년대 폭력적인 운동권 문화를 그린다.

그러나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대중의 정치 혐오에 기대 다분히 '신성화'된 80년대를 흔들거나 이제는 권력이 된 386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대와 시대의 화해를 말한다. 그 중심 인물인 윤희는 시대의 희생양을 자처하지 않고 부채의식도 없다. 미혼모의 길을 원망 없이 홀로 걸어가며 주변을 감싸안는 여자다.

영화 '오래된 정원'은 이처럼 새로운 80년대 인간형을 탄생시켰다. 투쟁보다는 포용의 인간이다. 시대에 포박되지 않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다.

영화는 80년대가 새로운 시대 우리에게 갖는 진정한 의미를 환기시킨다. 80년대의 새로운 유산을 발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임상수의 냉소주의가 모처럼 감동으로 발화한 영화다. "정치라니 짜증나는 소재인 걸 알지만 고리타분하리란 편견을 깨게 될 것"이라는 감독의 자신감이 밉지 않은 영화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