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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이회창이 '위대한 패배자'가 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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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로 가득 찬 세상보다 숨막히는 건 없다. 위대한 패배자가 위대한 세상을 가꾼다. 관용과 응시,유머와 균형 감각,인내와 희생, 불굴의 용기는 패배의 터에서 가꿔지곤 한다. 패배 자체가 위대하진 않을 것이다. 패배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건 패배 뒤의 행로다. 2007년 대선에서 이회창(71)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위대한 패배자의 행로를 가기 바란다. 1997년과 2002년, 그의 패배는 참담하고 공허하고 무능했다. 참담함은 한나라당 세력의 대표 선수로 출전해 2회 연속 패배한 것이다. 한나라당 세력의 참담함은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으로 전국적인 참담함으로 번지고 있다. 현재 진행형의 참담함이다.

공허함은 선거 컨셉의 공허함이다.이 전 후보의 컨셉은 ‘이회창 대세론’이었다. 대세론은 본래 워낙 큰 칼이어서 잘 못 들면 칼 잡은 사람이 먼저 상처입는다.웬만해선 쓰는 게 아니다. 1992년 ‘김영삼 대세론’처럼 3당 합당으로 ‘PK(부산ㆍ경남=김영삼)+TK(대구ㆍ경북=노태우)+충청권(김종필)’의 막강한 지역 연합적 물적 토대를 구축한 뒤에나 꺼내 들 수 있는 컨셉이었다.

이회창을 잡아 먹은 건 결국 이회창 대세론이었다. 자기가 진짜 대세인 줄 알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쫓아 내고,이인제 경쟁자의 탈당을 막지 않은데다 마지막 기회였던 김종필 충청권 대표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97년). 이 전 후보의 무능함은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데 있었다.답습의 무능함이다.제2차 대표 선수 출전 때 정몽준 후보에게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아, 노무현 후보한테 빼앗긴 사례를 상기해 보시라(2002년).

그런 이 전 후보에게 남은 길은 패배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패배자는 어떻게 되는가. 1952년과 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전해 2회 연속 패배한 사람이 있다. 이 전 후보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미국 정치인들 가운데 드믈게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는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ㆍ1961~65)이다. 변호사였다.스티븐슨 후보는 2차 대전의 영웅이자 국부(國父)처럼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와 두번 맞서 44%, 42%의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했다.(『위대한 패배자』)

닉네임은 ‘우아한 독설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공화당에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만일 그들이 우리와 관련한 거짓말을 중지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관련한 진실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그도 계속 패배하자 “가슴이 미어져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엉엉 울어 버리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죠.” 그는 패배한 뒤 오히려 큰 존경을 받았다. 질 게 뻔한 선거에 출전해 달라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인 책임감을 당원과 국민이 높이 샀다.

6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스티븐슨은 추호의 미련 없이 대권을 포기했다.그리고 케네디 선거 운동에 헌신했다. 케네디는 대통령에 오른 뒤 그에게 유엔 대사직을 맡겼다. 유엔 대사직은 스티븐슨 일생일대 조국에 대한 최고의 봉사였다. 쿠바 미사일 사태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증거와 논리와 격정적 언변으로 소련 대표를 무력화시킨 영웅담은 아직도 미국인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스티븐슨은 세 가지 방법으로 위대한 패배자가 되었다. 첫째, 대권 욕심을 깔끔하게 접었다.둘째, 민주당의 집권에 헌신했다.세째, 유엔의 소련 대표에 맞서 멋지게 승리할 실력을 갖췄다.

이회창 전 후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위대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첫째, ‘나는 2007년 12월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따라서 6월 한나라당 경선에도 출마하지 않는다’고 깔끔하게 선언할 것. 둘째, 다른 욕심 버리고 한나라당 집권에만 헌신할 것.예를 들어 그는 이명박씨나 박근혜씨의 경선 불복종을 막을 영향력이 있다. 세째, 혹시 유엔 대사에 나갈 경우를 대비해 김정일 북한 정권을 꾸짖고 설득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

전영기 정치부장 대우 [chuny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