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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미·일·유럽의 유명기업 현지취재|꿈을 실현하는 장인집단|세끼 밥먹듯 기술개발|일 전자제품 메이커 SONY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50년대만 해도 값싼 상품 정도로 치부되던 일제 전자제품이 세계 시장을 휩쓴 데는 소니(SONY)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의 특허를 사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세계 최초로 내놓았던 소니는 이어 VTR·CD(컴팩트 디스크)·워크맨 (소형 헤드폰 스테레오)에서 8mm비디오 핸디캠으로 이어진 가전 개발 경쟁에서 일본을 세계 최첨단으로 끌어올렸다.
『소니는 기술생산을 취미로 하고 있는 장인들의 집단이다.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기술연구를 세끼 밥보다 더 좋아하는 창조정신이 사내 곳곳에 숨쉬고 있다.』
지난해부터 소니 그룹 통괄회장직을 경하고 있는 오가 노리오(61)사장의 소니 스피리트에 대한 자랑이다.
그는 소니 사를 창업한 이부카이-모리다에 이은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오가 사장은 동경예대 음악학부를 졸업한 바리톤 가수라는 이색적 경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창업(소니 사의 전신인 동경통신공업)때부터 기술장인들 속에서 세계적인 전기메이커 경영의 꿈을 키워 왔다.

<순익 41% 늘어나>
57년 CBS·소니 사 사장이 되면서 소니가 세계적 브랜드로 명성을 쌓아「AVCC」(오디오+비디오+컴퓨터+커뮤니케이션) 거대그룹으로 지향하는 지금,「명 지휘자」로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오가씨 스스로는 소니 사에서 두 가지 꿈을 이뤘다.
첫 번째 꿈은 음악도 답 게 새로운 음반을 만든다는 것.
70년 CBS 소니 레코드 사장 직에 취임한 오가 씨는『토머스 에디슨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녹음에 성공한 해로부터 1백년 째가 되는 77년까지 새로운 전자미디어(매체)를 세상에 탄생시키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당시 CD의 보급에 적극적인 회사는 세계적으로 소니와 독일 폴리그램 등 불과 두개회사 뿐.
CD의 장래성에 회의를 품고 있던 당시 사람 사람들에게 81년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세계 음악 평론가들 앞에서 CD의 장래성에 대해 절찬했다.
82년 에디슨이 축음기 녹음에 성공한 이래 1백5년만에 소니는 CD상품을 시장에 내놓아 큰 호평을 받았다.
또 하나의 꿈은 핸디캠의 개발이다.
오가 사장은 카메라와 8mm무비. 카메라에 50년 가까이 정열을 불태운 수집광(매니어)이었다.
『신제품이 태어나는 대로 제일 먼저 여행에 갖고 갔다. 미국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여행자의 절반이상이 소니 사의 8mm비디오를 갖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참으로 기뻤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VTR가 시장에 등장하고 나서 15년 가까이 되지만 2분의 1인치(보통 VHS테이프)사이즈용 기재는 역시 너무 큰 느낌이 든다. 장래에는 보다 압축된 8mm로 바뀔 것이다.
그의 착안은 89년 시판에 성공한「핸디캠 TR 55」카메라 일체형 비디오로 결실을 보아 소니 본사 매출액을 크게 끌어 올렸다.
90년 3월 소니 그룹 전체 연결매출액은 2조8천7백98억 엔으로 전년대비 34·2%의 비약적 증가세를 기록했다. 순이익은 41·9% 증가한 1천28억엔, 매출·이익 모두 과거 최고로 전천후기업 소니의 위세를 자랑하는 숫자다.

<연구체제 3원 화>
「기술의 소니」가 추구하는「발상」시의 기본은 단 두 가지다. 첫째 항상 시장을 반걸음 앞서 나가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마킷 중시)한다. 둘째 아직 아무도 하지 않고 만들지도 않은 독창적 기술이나 신상품 개발에 도전한다(도전 정신)는 것이다.
소니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부카이-모리다-오가로 이어지는 최고경영자의 노심초사와 우여곡절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소니의 신화」를 만든 실제의 장인들이 그늘 속에서 겪은 온갖 시행착오는 기술 한국을 지향하는 우리 기업들에 귀감이 될 만하다.
「기술의 소니」에 빠질 수 없는 장인은 기하라 노부도시(현 본원 연구소 사장)다.
47년 입사 2년이 된 해 기 하다는 혼자 힘으로 자기테이프의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테이프, 레코드, 트랜지스터라디오, 트랜지스 TV,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VTR)에 이르기까지 세계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든 소니 제품이 기하라의 기술력에 의해 이루어진 발명 특허품이다.
기하라의 얘기는 명확하다.『재능이나 의욕이 있는 젊은이를 끌어들여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대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켜보다 방침이나 방향이 정해지면 외부잡음을 차단하고 연구개발에만 몰두케 해준다. 이것이 소니 정신이다.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 해결한다는 점에서 소니는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했고 소니의 연구조직은 이를 실현하는데 매우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소니의 연구개발체제는 그게 3원화 되어 있다.
각 사업본부(현재 19개)의 개발 부문은 앞으로 3년까지의 연구를, 종합연구소는 3∼6년의 기반기술·요소기술의 연구나 응용연구를, 중앙연구소는 6∼10년 앞의 기초연구를 각각 담당한다.
소니는 연구개발 내용을 레벨 1에서 4까지 나누어 각각의 연구 부서에 맡긴다. 예컨대 레벨 3∼4의 업무는 중앙연구소 소관이다.
「기술의 소니」도 쓴 경험이 있다. 이른바 제1차 VTR전쟁이다.
VTR기술에서 세계 제일인 소니는 이른바 베타맥스형 VTR의 기술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다.
몇 걸음 뒤 다른 방식(VHS)의 VHS개발에 성공한 마쓰시타 등 소니 외의 진영은 기술공유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물량전술로 맞섰다. 결과는 소니의 완전한 실패.
그러나 소니의 기술력은 베타맥스 개발과 동시에 모든 사이즈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과제에 도전했다.
늘 현상에 만족하지 않는 이부카이는『어떤가 자네들, 이 기계(VTR)를 반으로 축소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될 텐데』라고 말문을 던졌다.
이에 따라 구성된 P80팀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8mm 비디오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팀장 모리다는 다만『이번 제품은 5년, 10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기술을 짜 넣자. 이 프로젝트의 최대 노림 수는 최신의 기술이다』고 말할 뿐이었다.
80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품 만들기에 착수, 불과 4개월만에 견본 품을 만들어 냈다.


소니의 대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 89년 6월21일「TR 55」핸디캠이 출현하면서 빈사상태에 있던 소니 등 베타진영은 완전히 VHS 시장을 다시 압도했다.
VHS진영인 마쓰시타 전기나 일본 히타치 관계자는 소니 상표의 신제품을 보자,「과연 소니는 무섭다」며 비명을 질렀다.
동경시내 시나카와 구에 빌딩 군을 이루고 있는 소니 그룹 본사건물 한가운데는 초창기 소니가 시도했다 실패한 전기밥솥과 우리에게도 낯익은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다.
당시 6평 남짓한 사무실이 있고 벽에는 45년 당시의 창립취지서가 보란 듯이 걸려 있다.
그 첫머리에는『부당한 영리주의를 버리고 어디까지나 내용의 충실, 실질적인 활동에 중점을 두어 오로지 규모를 키울 터…. 극력 제품의 선택에 노력해 기술상 곤란한 점은 오히려 환영, 사회적으로 이용도가 높은 고급 기술제품을 대상으로 할 것』을 선언했다.
지난해 미국영화사 콜롬비아를 매수,「미국의 혼을 샀다」고 까지 비난받은 소니 사의 시작은 이처럼 철두철미한 장인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동경=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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