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 다툼에만 매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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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마라톤은 기록단축을 위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지 다른 선수와의 순위 경쟁이 아니다.』
한국마라톤은 이 같은「마라톤정신」의 실종으로 이룰 수 있었던 한국 기록경신을 또 놓쳤다.
17일의 동아 마라톤 대회에서 레이스가 4분의3이나 진행된 30km기점까지 무려 30명이 함께 선두그룹을 형성하는 해괴한 레이스 형태를 보이며 순 외 다툼에만 골몰한 끝에 기록경신 에 실패, 체육계 안팎의 여망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한국 마라톤은 이번에도 고질적인「순위 병」을 치유하지 못한 채 지난해 기록보다 1분 퇴보, 기록 경신의 기대를 또다시 내년으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됐다. 세계는 앞으로 달리는데 왜 한국 마라톤은 뒤로 달리는가.
전문가들은 마라톤 지도자들의 신념과 자질부족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팀간의 치열한 우위다툼으로 어느 정도 순위경쟁이야 불가피하겠지만 대부분의 감독들이 「순위 안에 골인, 1년 농사나 짓자」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 사명감이 극히 결여돼 있는 것.
이날 레이스에서는 30여명이 중반이후까지 무더기로 선두그룹을 형성하는 바람에 반환 점 을 도는 시간만 해도 최고 1분까지 소요(체력소모에 끼친 영향 등을 추산) 됐다는 지적이며 28km지점에서는 유력한 우승후보 황영조(코오롱), 송재필(제일제당)등 4명이 발에 걸려 넘어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경기에서는 물론 김원탁(26), 김완기(24·코오롱)등 레이스를 주도할 만한 선수들이 불참, 선수들이 기준을 잃고 우왕좌왕한 끝에 정상적인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다는「핑계」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도자와 선수들의 자질 및 사명감 부족만을 부각시킬 뿐 납득할 설명은 못 된다는 게 중론이다.
마라톤 강국의 경우 대부분 선수들의 래프타임(5km, 혹은 10km 구간별 기록)이 혼자 뛰든, 여럿이 뛰든 일정한데 비해 이날 기록은 초반5km까지 지나치게 빨랐고 그 여파로 5km이후 30km까지는「기다시피 할 정도」로 선수들이 흐느적거렸다.
감독 및 선수들이 훈련 시에 유념할 대목이다.
또 우승후보로 지목되던 김완기가 독감과 장염으로 대회에 불참, 선수 관리에 원시적 허점을 드러냈고 일부 정상급 선수들은 대회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쳤다고 실토, 레이스의 실패가 이미 예정된 셈이어서 지도자들의 책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날 경기는 대회운영 및 진행에도 여러 문제점을 던졌다.
출발직후 트랙을 세 바퀴나 돌게 해 체력소모 증가와 기록지체(1분 정도의 마이너스요인) 를 부채질했다는 것이 체육과학대 최충식 교수의 지적이다.
즉 세 바퀴를 돌게 되면 한바퀴에 4초씩 모두 12초가 더 소요되게 되며 코너 회전시의 체력소모가 직선도로 코스에 비해 심해 초반 5km에서의 오버페이스를 가져오는 함정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코스형태는 외국의 경우 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또 이날 레이스에서는 응원차량이 지나치게 많이 동원돼 선수들이 매연과 교통사고 위험이라는 이중 부담을 안고 달려야 했다(응원차량을 허용하는 나라는 한국뿐임).
국내의 마라토너들은 마음놓고 도로 연습할 만한 곳이 전국 어디에서도 찾기가 어려워 트랙훈련으로 대체, 전용도로 훈련장의 시급한 확보도 큰 과제의 하나이나 관계기관이나 단체 어느 곳도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신동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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