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석환특파원 현지취재/흔들리는 소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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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혁대결 유혈사태 일보전/잇단 시위 시민들 반응도 각각/17일 국민투표 앞두고 긴장 고조
1880년대 러시아제국의 혁명적 상황을 방불케할 정도로 최근 소련의 상황이 혼란에 휩쓸리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붉은광장에 50만명 규모의 반고르바초프 시위가 전개됐다. 급진개혁파들은 완전한 정치자유를,분리파들은 탈소독립을,민중은 경제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혼란은 17일의 국민투표를 앞두고 더욱 심해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소련의 격동현장에 김석환기자를 특파,1개월간의 순회취재결과를 몇차례 나눠 싣는다.<편집자주>
지난 10일 오전 10시.
소련 모스크바시 붉은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보프스키대로등 주요거리에는 일제히 「17일에 있을 국민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플래카드들이 내걸렸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글씨로 쓴 이러한 플래카드들은 공산당등 친고르바초프계가 내건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내걸린 플래카드들은 이날 낮 12시부터 시작된 친옐친,반고르바초프 시위에 밀려 빛을 잃고 있었다.
마침 주보프스키대로에서 고리키가쪽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기자가 택시운전기사에게 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를 가리키자 그루지야인인 운전사 사샤는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려보였다.
그러고는 고리키가에서 마네츠광장쪽으로 몰려가는 친옐친 반국민투표시위 인파를 향해 지지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낮 12시. 마네츠광장을 가득메운 군중들은 일제히 「옐친」「옐친」을 연호하며 국민투표 반대를 촉구하는 연사의 외침에 환호했다.
전국적으로 50만명 이상이 참여한 이날 시위는 전날 새로운 야당의 결성과 고르바초프의 즉각 사임을 요구한 옐친을 지지하기 위해 민주러시아당등이 주도한 행사였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시위중 최대규모라는 평가를 받은 이날의 시위에 대한 모스크바 시민의 반응은 입장에 따라 각각이다.
자신을 온건합리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알렉세이군(22·모스크바대)은 『도대체 이러한 시위가 당면한 경제난과 국가혼란의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자신은 여전히 고르바초프를 지지하고 17일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옆에서 알렉세이군의 말을 듣고 있던 나타샤양(19·모스크바대)은 『고르바초프를 더이상 믿기엔 의심스런 구석이 많다. 왜 이렇게 서둘러야만 하는 것인가. 좀더 대화를 진행해야지 무조건 투표로 결정내려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자신은 급진개혁파의 기수인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 옐친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소련은 현재 17일로 다가온 국민투표를 앞두고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대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미 반고르바초프 시위에 50만명 이상을 동원,기세를 올린 급진개혁파는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연방조약체결 거부 등을 외치며 공산당에 대항할 신야당 건설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반고르바초프,반연방을 내건 급진개혁파들의 「힘」은 겉으로 드러난 요란한 목소리나 동원된 인파와는 달리 커다란 위협이 되지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고프바초프 진영은 각 공화국간에 제각각의 노선을 주장,내부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옐친은 중앙정부와의 권력대결에 치중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반면 발트해3국은 점령군으로부터의 해방을,몰다비아는 인종적 형제국인 루마니아와의 새로운 국가연합을 통한 합병을 각각 꿈꾸고 있다.
이외에 각종 지방공화국·자치공화국 등이 자신들의 고토수복과 독립,연방에 대한 경제적 의무의 감소 등 제각각의 목적으로 반연방의 대열에 나서고 있다.
현재 소련엔 인구 2억9천만명중 6천만명 이상이 고향이 아닌 이방지역에 살고 있으며 1백30여개의 민족이 1백70개의 언어를 사용해 나름대로의 자치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이유를 근거로 분출하는 욕구를 제기한다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난제는 「어떠한 국적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도 완전히 보장될 동등한 주권공화국 동맹」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국민투표로 이를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르바초프는 투표 하루전인 16일 TV를 통해 대 국민설득연설을 실시,연방보전을 위한 그의 마지막 호소를 할 계획이다.
그러나 발트해3국등은 연방조약체결을 위한 국민투표에 거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고 공산당은 이들 지역에서 독자적인 투표를 실시,지방공화국의 결정에 도전할 계획이다.
국민투표를 며칠 앞두고 분열과 대결의 열기가 소련전체에 높아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발트해3국은 유혈사태 일보직전까지 이르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높여가고 있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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