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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시인」서 「정치투쟁가」 변신/검거된 박노해씨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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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고교졸업뒤 노동계 투신/사노맹사건후 경찰추적 받아와/필명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준말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씨(33·본명 박기평)가 10일 안기부에 검거돼 80년대 중반이후 문단과 노동계를 풍미했던 「박노해현상」의 실체가 밝혀지게 됐다.
82년말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박씨는 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표,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박씨는 당시 『노동자계급의 건강한 정서를 담아냈다』는 평가와 함께 「박해받는 노동자해방」을 뜻하는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노동계는 물론 일반시민들사이에서 관심을 끌었다.
박씨는 지난해 10월 안기부의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사건발표이후 공개수배를 받아왔지만 실질적으로는 85년 11월부터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왔다.
안기부는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각종 시와 산문·정치평론이 개인 박기평의 글이라는 입장이나 89년이래 발표된 글의 분량이 방대하며 깊이있고 분석적인 정세비판을 담고 있어 「박노해」는 공동창작집단의 대표필명일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씨가 지난해 모월간지 12월호에 발표한 「이땅의 자식으로 태어나」라는 자전적 수기와 안기부자료들을 종합하면 박씨가 최기의 노동자 시인으로부터 본격적인 정치투쟁가로 변신한 것은 85년 8월 서울지역 노동조합 연합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박씨는 57년 11월20일 전남 함평군에서 출생,보성군 벌교중학교를 졸업한뒤 상경,서울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목포에서 남로당에 참여,여순반란사건에 깊이 관여한 뒤 빨치산투쟁에 참가했으며 그가 6세때 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의 형(41)은 가톨릭신학대를 졸업하고 지난달 7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여동생은 수녀이며 노모(65)는 서울 시흥동에서 혼자 어렵게 살고 있다.
중학시절 훌륭한 정치가의 꿈을 가졌던 박씨는 선린상고야간부시절 서울 경동교회와 향린교회에서 의식있는 운동권대학생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이무렵 교회야학에서 이대약대에 재학중인 야학교사 김진주씨(36)를 만나 83년 3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김씨는 한때 약국을 경영하기도 했으나 남편 박씨와 함께 지하노동운동을 계속하다 지난달 27일 안기부에 구속됐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극복을 위한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깨달은 박씨는 82년 서울 성수동 (주)마그마에 운전사로 취업,현장경험을 쌓은뒤 84년 6월 경기도 안양의 안남운수에 입사,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박씨는 3년만에 회사노조위원장에 출마했으나 강경구호를 내건 그를 수상히 여긴 회사측이 신원조회끝에 출신학교를 속였다는 이유로 해고시켰다.
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대개 이 시기에 쓴 것들이다.
박씨는 대통령선거당시 백기완후보를 지원했으며 89년 4월 창간한 「노동해방문학」에 핵심 필진으로 참여하면서 사회주의적 혁명가로 변신했다.
박씨는 각종 기고문을 통해 ▲전대협의 비폭력노선 선언 ▲장기표씨의 진보정당결성 당위론 ▲대우 김우중회장의 자본론 ▲노태우대통령의 이미지 메이킹등을 신랄히 비판,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안기부에 따르면 박씨는 이때부터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사노맹중앙위원겸 편집책으로 활동해 왔다.
지난해말에는 도피중인 박씨의 치료비 명목으로 이돈명 조선대총장등 각계인사 55명이 성금을 거둬 전달,문제가 되기도 했다.
안기부는 박씨와 백태웅씨(전 서울대총학생회장·수배중)등 5명이 사노맹을 결성,백씨가 총책을 맡고 박씨등이 투쟁이론을 생산해온 것으로 밝히고 있다.
사노맹결성사실은 89년 11월20일 「사노맹출범선언문」을 통해 공개선언 됐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조직원 숫자는 1천6백여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박씨의 검거로 박씨의 행적·실체와 함께 사노맹의 조직도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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