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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7)나의 친구 김영주<제85화>|서울도착(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다음날 일찍 나는 김영주와 함께 수용소를 나섰다. 우리는 먼저 우리 집 형편을 본 후 다시 와서 박창수·문동수를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중국에서 입었던 대로 청색군복차림으로 낙원동 85의 2(현 한국 남 병원 바로 뒷짐)인 우리 집에 갔더니 가족은 전쟁소개로 시골로 가 있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곧 중림동 204 이명래 고약 집으로 갔다. 이명래씨는 나의 5촌이다.
그 곳에서 우리 큰형(이용우)이 서울시청 영선 과장으로 있다는 것을 알고 시청에 갔다. 형은 보이지 않고 직원들이 친절하게『과장님은 친구들 만나러 용금옥에 가셨다』면서 시청 후문 쪽으로 가보라고 길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용금옥은 서울신문사 뒤 지금의 코오롱건물 자리다.
전란의 중국대륙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혈육상봉을 촌 각에 두고 내 가슴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윽고 용금옥 판자 문을 삐그덕 제치고 들어섰더니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홀 한가운데 테이블을 둘러싸고 이미 거나해진 한 무리의 주객들….
그들은 우리 큰형 이용우·시인 정지용 선생, 그리고 바이올린을 하는 이영세 선생(이대교수), 그리고 나전칠기의 명인 강창원 선생이었다. 기막히게 반가운 얼굴들.
나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다가서서『형님, 용상이가 돌아왔습니다』고 했다. 내 말은 떨려서 아마도 전달이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넋을 잃은 듯 새하얘진 형이 한참만에 야『뭐, 뭐? 네가 정말 용상이냐?』하면서 달러 들어 힘껏 끌어안으며『죽은 줄 알았던 네가 돌아오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고 몸부림쳤다.
중국대륙이나 태평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오는데도 해방 1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나를 꼭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형은 그야말로 천만 뜻밖에 나타난 나를 끌어안고 한참동안 말없이 흐느끼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두 손을 합장, 기도를 올렸다. 홀 안의 술꾼들도 조용했다.
그 고요가 얼마나 흘렀을까. 형이 돌연 일어서서 큰소리로『여러분! 일본군에 끌려가서 죽은 줄만 알았던 내 동생이 지금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다같이 축하해 주십시오. 술은 얼마든지 제가 내겠습니다』하며 다른 테이블 손님들에게 광고를 하는 것이었다.
홀 안에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용금옥 주인 내외가 허겁지겁 달려나와 축하인사를 하고 손님들도 자기 일처럼 반기며 건배를 청했다.
형의 친구들은『어서 어머님께 알려 드리라』고 했다. 그러나 형은『집에 어머니가 혼자 계신다. 전화로 알리면 기절을 하실 텐데 돌볼 사람이 없다. 어서 축배 나들고 가자』고 했다.
이영세 선생이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철철 넘치도록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이번에는 정지용 선생이 술을 따르면서『용상아, 입대할 때 나를 덕이나 원망했지.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거야』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다. 내가 입대하는 전날 밤 낙원동 우리 집 대청마루에서는 나의 송별연이 벌어졌는데 그때 친척이나 손님들은 일본국기의 흰 여백에 나의 안전을 기원한다는 격려의 글을 써 줬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정지용 선생은『용감히 싸워 이겨「금치 훈장」을 타 오라』고 썼던 것이다.
「금치 훈장」이란 일제의 최고무공훈장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일본을 부수고 오라는 지용 선생의 참뜻은 모르고 진짜 일본을 위해 싸우라는 줄 알고서 내 방문 우리를 잠근 채 「차마 지용 선생이 그럴 줄 몰랐다」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지용 선생은 지금 그 일을 회상하며 내게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주는 술을 나와 김영주는 사양하지 않고 쭉 쭉 받아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맑아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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