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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지구당 폐지 성공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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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때때로 정치라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치라고 했던가. 얼마 전까지 정치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한나라당이 온갖 '혁신적인' 개혁안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혁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던' 김종필 자민련 총재까지 정치개혁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연유이든 반가운 일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정치권은 지구당 폐지, 선거공영제 등 정치개혁에 합의했다.

*** 돈 따라 움직이는 선거운동원

이러한 정치개혁안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구당 폐지안이다. 그동안 지구당은 '돈 먹는 하마'라는 비판과 함께 고비용 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받아 왔다. 지구당 유지비는 정치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월 2천만원 정도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년이면 2억4천만원 정도 드는 것이고,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약 10억원의 비용이 지구당 유지비로만 소요되는 셈이다. 국회의원의 세전(稅前) 연소득이 각종 수당을 다 합쳐도 1억원 정도이니 후원회비 및 정당보조금으로 연 3억원 이상을 받아야 선거비용은 고사하고 지구당이라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당의 폐지는 고비용 정치에서 탈피하려는 정치권의 의지를 과시하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과연 지구당 폐지가 의도한 대로 돈드는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안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리나라의 지구당은 정당의 하부조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구당 위원장의 당선을 돕기 위한 사조직의 속성을 갖는다.

지구당 운영비가 많이 드는 까닭은 지구당 운영이 당의 이념과 정책에 공감해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발적으로 정당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에 의해 움직이는 동원된 인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선거에 많은 돈이 드는 까닭도 돈을 쓰지 않으면 '조직'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정치 현실을 감안할 때 내년 초로 다가온 선거를 앞두고 지구당을 폐지한다고 해서 고비용 정치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구당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지역구민들이 지구당이 폐지됐다고 해서 이제 자발적으로 나서 선거운동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정치인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결국 지구당 조직이 사라진 자리에는 후보자들의 사조직이 대신 들어서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구당도 사실상 지구당 위원장의 사조직으로 기능해 왔던 만큼 그저 외형상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법적 규제를 받는 정당의 공조직을 폐기하고 사조직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만큼 은밀하게 더욱 많은 돈이 사용될지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1920년대 미국에서 금주법(禁酒法)의 제정이 음주의 포기로 이어지기보다는 음성적인 불법행위를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과 같은 이치다.

고비용 정치가 돈에 의한 조직동원 때문이라면 그 해결책은 유권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높이거나 혹은 돈으로 조직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하는 길이다. 하루아침에 자발적 참여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정치자금 규제를 통해 동원에 의한 선거운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일밖에 없다.

즉, 지구당 폐지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 내역에 대한 철저한 회계감사를 통해 투명성을 확립하고, 불법이 행해졌다면 예외없이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하는 일이다.

*** 조직 동원 관행 과감히 고쳐야

개혁은 언제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다. 기득권을 포기하더라도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 환경을 만들겠다는 정치권의 결연한 의지가 있을 때 정치개혁은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효과가 의심스러운 지구당 폐지나 후원회 금지처럼 언론의 눈길을 끌 만한 이벤트성 대안만을 제시하는 것은 검찰의 정치자금 수사에 집중된 국민의 시선을 분산시켜 정치적으로 불리한 국면을 모면하려는 술책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정치권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