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나가는 물건 모두 뺏겼죠”/쿠웨이트 교민들 어떻게 지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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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비축한 쌀·고추장으로 겨우 연명/붙잡혔다 한국인 밝히자 풀어줘
라우다구 다마스쿠스가의 한국대사관 옥상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마당엔 6개월 동안 손질이 안된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로 어지러웠다.
대사관건물로 들어가는 현관자물쇠는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 영사과 사무실,대사집무실의 전화·팩시밀리 등 집기는 그대로였다. 약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 1층,지상 3층의 공관은 지금이라도 당장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3일 이곳에서 중앙일보 취재팀을 맞은 한국인 교포들은 모두 무사했으나 초췌한 모습들이었다. 이라크군 점령기간중에도 철수하지 않고 쿠웨이트시에 남아있던 9명의 교포들중 대부분은 지난달 27일부터 매일 오전 10시에 대사관에 나와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대사관직원이 돌아올 때까지 대사관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유재성씨(50·쿠웨이트시 살미아지역 바그다드가 거주)등 잔류교포 9명은 이라크군 점령기간동안 신체상의 피해는 없었으나 재산피해를 많이 보았다고 밝혔다.
부인·아들을 한국으로 피신시킨후 혼자 남아있는 최길웅씨(48·사업·하왈리지역 거주)는 『이라크군이 찾아와 창고를 부수고 물건을 모두 뺏어갔다』며 『팔레스타인인들도 몰려와 물건을 약탈하고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이라크군은 또 교포들의 살림집에 들어와 쿠웨이트인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TV·가재도구 등을 닥치는 대로 강탈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라크군이 침공하자 현대건설이 공사를 중단하고 철수한 쿠웨이트시 중심 무르갑 도로공사현장과 키스트현장 등 두곳에서는 크레인·페이로더·불도저 등 중장비와 승용차·트럭 등 모두 3백여대의 장비 및 차량이 이라크군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현장을 지키던 교민 유씨가 전했다.
철수한 현대건설로부터 장비관리를 위임받은 유씨는 이라크군이 장비를 끌어가려 할때 인도인 인부들과 함께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총을 겨누면서 각종 장비는 물론 자동차 타이어까지 뺏어갔다고 말했다.
무르갑현장과 키스트현장에는 현장사무소와 창고 등이 대부분 파괴된채 버려져 있었으며 이라크군에 의해 부속들이 뜯겨나간 차량,장비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다음은 쿠웨이트시 잔류교포(강제억씨 및 부인·딸 성은양,유재성·조성목·오호·최길웅·신자철·전성규)중 이날 대사관에 나와있던 남자 7명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소감이 어떤가.
『살아남아 동포들을 다시 보게 되니 기쁘다. 고국에 있는 가족·친척들에게 어서 무사함을 알리고 싶다.』
­이라크군에 피해는 보지 않았나.
『군인들에 의해 연행됐던 적도 있었으나 한국인이라고 하자 호의를 갖고 쉽게 풀어줘 별다른 일은 없었따.』
­쿠웨이트인들을 대상으로 약탈이 많았다는데….
『우리들도 물건을 모두 약탈당했다. 교포들이 대부분 상점을 갖고장사하면서 어떤 사람은 창고도 갖고 있는데 이라크군에 의해 모두 털렸다. 심지어 집안으로 들어와 TV·가전제품·가재도구 등도 가져갔다.』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쌀등을 몰래 저장해 놓고 욕조등 물을 담을 수 있는 곳에는 모두 물을 받아 놓았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반찬은 고추장 하나지만 굶지않고 버틸 수 있었다. 물이 3,4일분 밖에 남지 않아 걱정이다. 앞으로 곧 식수배급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과의 연락은.
『모든 통신이 두절돼 몇달째 못하고 있다. 걱정들이 많을텐데 돌아가면 무사하다고 전해달라.』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매일 한국대사관 사무실에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이를 계속할 예정이다. 또 식량이 부족한 교포들에게는 서로 도움도 주고 있다.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돌아올때까지 대사관을 지키겠다.』
교포들은 다시 쿠웨이트를 찾을 기회가 있으면 달력과 식수를 좀 갖다달라고 부탁했다.<쿠웨이트시=김주만·김상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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